어두운 화면 한가운데에서 얼굴 하나만 떠오르듯 밝게 빛나는 그림, 한 번쯤 보셨을 거예요. 그 조명 방식에는 아예 사람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진 스튜디오와 영화 현장에서 쓰는 '렘브란트 조명'이에요. 400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빛 다루는 법에 자기 이름을 남긴 화가, 렘브란트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방앗간 집 아들, 암스테르담의 초상화가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1606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방앗간을 했어요. 화가 가문도 귀족 집안도 아니었죠.

이야기가 달라진 것은 1630년대 초, 그가 암스테르담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돈이 모이는 항구 도시였고, 성공한 상인과 직업 조합들이 자기 얼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했어요. 초상화 수요가 넘치던 자리에 그가 정확히 도착한 셈입니다.

1632년 그린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의사들이 모인 자리를 담은 단체 초상이었는데, 이 한 점으로 그의 이름은 도시에서 확실한 자리를 얻었어요. 아직 서른도 되기 전이었죠. 주문이 밀려들었고, 1634년에는 사스키아와 결혼하며 살림도 함께 올라섰습니다.

렘브란트 한눈에
태어난 해와 곳
1606년, 네덜란드 레이던
세상을 떠난 해
1669년, 암스테르담. 예순셋이었습니다
이름을 알린 그림
1632년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가장 유명한 그림
1642년 〈야경〉
가장 잘한 것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인물을 조각하는 명암법, 그리고 에칭 판화
남긴 자화상
유화·판화·드로잉을 합쳐 100점 안팎, 현존 80점 안팎

어둠이라는 재료

그의 화면을 처음 보면 어둡다는 인상부터 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은 빛이 모자라서 생긴 것이 아니에요. 화면 대부분을 일부러 어둠에 묻어 두고, 정말 보여주고 싶은 곳에만 빛을 남긴 겁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형태를 깎아 내는 이 방식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우리말로는 명암법이라고 불러요.

핵심은 빛의 양이 아니라 각도입니다. 광원이 인물의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한 위쪽에 놓이면, 코의 그림자가 반대편으로 드리우면서 그늘진 뺨에 작은 삼각형 모양의 밝은 자리가 하나 남아요. 사진과 영화 현장에서 '렘브란트 조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히 이 배치입니다.

렘브란트 조명: 광원 하나가 남기는 삼각형 광원 하나 그늘로 넘어간 쪽 절반은 일부러 비웁니다 뺨에 남는 삼각형 눈 아래, 코 그림자 옆 빛을 받는 쪽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한 위쪽 45도 안팎에 광원을 두는 배치입니다
광원 하나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얼굴의 절반이 어둠으로 넘어가고, 그 경계에 삼각형 하나가 남습니다. 렘브란트가 어둠을 넓게 쓴 이유는 어둠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어둠이 있어야 빛이 형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이런 표현이 가능했던 데는 재료의 몫도 큽니다. 천천히 마르는 유화라야 얇고 투명한 색을 여러 층 겹쳐 깊은 어둠을 쌓을 수 있거든요. 재료가 표현을 어디까지 허락하는지는 재료와 기법에서 따로 정리했어요.

그는 붓만 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동판에 산으로 선을 부식시켜 찍는 에칭에서도 손꼽히는 이름이었고, 생전의 국제적인 명성은 오히려 판화 쪽이 더 멀리 퍼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판이 어떻게 작품이 되는지는 판화, 복제품 아닌가요?에서 다뤘어요.

〈야경〉, 줄을 세우지 않은 단체 초상

렘브란트 판 레인, 야경(De Nachtwacht), 1642, 유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렘브란트 판 레인, 〈야경〉, 1642.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검은 옷의 대위와 그 오른쪽 노란 옷의 부관에게 빛이 모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저마다 다른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642년에 완성된 이 그림의 원래 성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의 민병대', 곧 도시를 지키는 시민 민병대의 단체 초상입니다. 이런 그림에는 오래된 관례가 있었어요. 비용을 나눠 낸 사람들이니 모두 고르게, 얼굴이 잘 보이게, 나란히 줄을 세워 그리는 것이죠.

렘브란트는 그 관례를 깼습니다. 인물을 한 줄로 세우는 대신 무리가 막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처럼 배치했어요. 누군가는 창을 세우고, 누군가는 북을 치고, 대위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출발을 지시합니다. 빛도 공평하게 나뉘지 않고 몇 사람에게만 쏟아지죠. 단체 사진이어야 할 화면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이 된 겁니다.

모두를 똑같이 보여주는 대신, 그는 무리 전체가 움직이는 한순간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단체 초상에서 이건 대단한 파격이었어요.

'야경'이라는 이름은 렘브란트가 붙인 것이 아닙니다. 화면을 덮은 바니시(니스)가 세월과 함께 누렇게 어두워지자 후대 사람들이 밤 장면으로 오해했고, 그 별명이 그대로 굳어 버린 거예요. 원래 이 그림은 낮 장면입니다.

그림이 겪은 일은 더 있어요. 1715년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옮겨질 때 벽 크기에 맞추느라 캔버스 가장자리가 잘려 나갔습니다. 특히 왼쪽이 많이 사라졌죠. 우리가 보는 화면은 렘브란트가 그린 화면보다 좁습니다.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있어요.

빛이 꺼진 자리, 1642년부터 1669년까지

〈야경〉이 완성된 1642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해이기도 합니다. 같은 해에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났거든요. 대표작과 가장 큰 상실이 한 연도에 나란히 적히는 셈이에요.

그 뒤로 살림이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씀씀이가 컸고 수집벽이 있었어요. 마음에 드는 것을 계속 사 모았고, 지출은 벌이보다 빨리 늘었습니다. 1656년 그는 지급 불능을 선언합니다. 집과 수집품이 경매로 하나씩 팔려 나갔어요.

만년에는 사람도 차례로 떠났습니다. 연인 헨드리케가 1663년에, 아들 티투스가 1668년에 먼저 갔고, 이듬해인 1669년 렘브란트도 예순셋으로 눈을 감았어요. 그는 베스터르케르크의 임대 묘에 묻혔는데, 정확히 어느 자리인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림과 삶을 나란히 놓은 63년 그림 1606 레이던의 방앗간 집에서 태어나다 1632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42 〈야경〉 완성 아내 사스키아 사망 1656 지급 불능 선언, 경매로 흩어진 수집품 1663 연인 헨드리케를 먼저 보내다 1668 아들 티투스를 먼저 보내다 1669 예순셋, 암스테르담에서 만년까지 이어진 자화상 붓은 놓지 않았습니다 1642년 한 줄에 대표작과 가장 큰 상실이 함께 적힙니다
왼쪽은 화가로 남긴 것, 오른쪽은 삶에서 잃은 것입니다. 1642년 한 줄에서 두 칸이 동시에 채워지고, 그 뒤로는 오른쪽만 계속 채워지는데도 왼쪽 그림은 오히려 깊어졌어요. 잃은 것이 그림을 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화가의 가장 이상한 대목입니다.

100점의 자화상, 스스로 쓴 연대기

렘브란트 판 레인, 63세의 자화상(Self Portrait at the Age of 63), 1669, 유화,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렘브란트 판 레인, 〈63세의 자화상〉, 1669.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세상을 떠난 해에 그린 얼굴입니다. 배경은 거의 비어 있고 젊은 날의 값비싼 소품도 사라졌어요.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렘브란트가 남긴 가장 특이한 기록은 자기 얼굴입니다. 유화와 판화, 드로잉을 합쳐 100점 가까이 자신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그중 80점 안팎이 남아 있어요. 한 사람이 자기 얼굴을 이만큼 오래, 이만큼 자주 기록한 사례는 미술사에서 흔하지 않습니다. 판화와 드로잉이 회화와 나란히 세어지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드로잉·스케치·데셍을 참고하세요.

왜 그렇게 그렸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가 아니에요. 표정과 조명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는 모델이 자기 자신뿐이었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을 테고, 이름값이 오른 뒤에는 화가 본인의 얼굴 자체가 팔리는 상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 그림들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그런 설명을 넘어서는 것이 보여요. 젊은 날의 자화상은 자세부터 자신만만합니다. 차림새는 화려하고, 시선은 화면 밖을 당당히 내려다보죠. 파산 이후의 얼굴은 다릅니다. 장식이 사라지고 붓질은 거칠어지고, 남는 것은 늙어 가는 피부와 이쪽을 조용히 보는 눈뿐이에요.

그러니까 그의 자화상은 화가의 초상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연대기입니다. 성공도 파산도 상실도 얼굴에 그대로 적혔고, 그는 그것을 지우지 않았어요.

암스테르담의 어둠, 델프트의 낮빛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 또 한 사람의 거장이 있었습니다. 1632년에 태어난 요하네스 베르메르, 렘브란트보다 한 세대 아래예요. 두 사람은 같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살았는데 빛을 다루는 방향은 정반대였습니다.

베르메르는 델프트의 방 안에 앉아 왼쪽 창으로 들어오는 낮빛을 오래 들여다봤어요.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어둠 속에서 필요한 만큼만 빛을 꺼내 인물에게 씌웠죠. 하나는 빛을 받아들이는 그림이고, 하나는 빛을 만들어 내는 그림입니다. 같은 시대의 다른 선택이 궁금하다면 베르메르 입문을 이어서 읽어 보세요.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밝은 곳부터 보지 마시고, 어두운 곳이 어디까지인지를 먼저 따라가 보세요. 어디서 어둠이 끝나고 빛이 시작되는지 그 경계선을 눈으로 짚어 보면, 화가가 무엇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작품 한 점 앞에서 시간을 쓰는 요령은 미술관 감상법에 정리해 두었어요.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나 도시 최고의 초상화가가 됐다가 파산으로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끝까지 놓지 않은 일은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63년의 기록이 100점 가까운 자화상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자주 묻는 질문

렘브란트는 왜 유명한가요?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인물을 조각하는 명암법을 끝까지 밀어붙인 화가예요. 그늘진 뺨에 삼각형 빛을 남기는 그의 조명 배치는 오늘날 사진과 영화에서 '렘브란트 조명'이라는 용어로 그대로 쓰입니다. 여기에 관례를 깬 단체 초상 〈야경〉과 100점 가까운 자화상이 더해져 서양 미술사의 대표 이름이 됐습니다.

렘브란트의 〈야경〉은 정말 밤 장면인가요?

아닙니다. 낮 장면이에요. 화면을 덮은 바니시가 세월과 함께 누렇게 어두워지면서 후대 사람들이 밤으로 오해했고, 그 별명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죠. 원래 성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가 이끄는 시민 민병대의 단체 초상이었어요.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왜 그렇게 많이 그렸나요?

유화와 판화, 드로잉을 합쳐 100점 가까이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표정과 조명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는 모델이 자기 자신뿐이었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고, 이름값이 오른 뒤에는 화가의 얼굴 자체가 팔리는 상품이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청년기부터 파산 이후 노년까지 한 사람의 전 생애가 얼굴로 남은 셈이죠.

렘브란트 조명이 뭔가요?

광원을 인물의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한 위쪽에 두는 조명 배치를 말해요. 코의 그림자가 반대편으로 드리우면서 그늘진 뺨에 작은 삼각형 모양의 밝은 자리가 하나 남는 것이 특징이죠. 화가의 이름이 그대로 사진과 영화의 조명 용어로 굳은 드문 사례입니다.

렘브란트 작품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야경〉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있습니다. 1669년에 그린 〈63세의 자화상〉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이에요. 자화상과 에칭 판화는 세계 여러 미술관에 흩어져 있어서, 유럽 대형 미술관의 옛 거장 전시실을 둘러보면 한 점쯤 만날 확률이 높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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