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호박에 까만 점이 빼곡히 박혀 있고,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들어서면 빛의 점이 끝없이 증식합니다. 한 번 보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이 이미지의 주인이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예요. 생존 작가 가운데 작품값이 가장 높은 축에 들고,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장 친숙한 현대미술가 중 한 명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위해 그녀의 세계를 짧게 안내할게요.
점에서 시작된 세계
쿠사마는 1929년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물방울무늬와 그물 같은 무늬가 눈앞의 세상을 뒤덮는 환각을 경험했다고 해요. 그 압도적인 감각을 그녀는 종이와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보이는 것을 그림으로 꺼내 놓으며 불안을 다스린 셈이에요. 쿠사마의 미술이 평생 반복과 증식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self-obliteration', 곧 자기 소멸이라 불렀어요. 점을 찍고 또 찍어 자신과 세계의 경계가 점 속으로 녹아드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쿠사마의 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을 다스리고 세계와 이어지려 한 흔적에 가깝습니다.
기억해 두면 좋은 세 가지 모티프
물방울무늬(폴카도트)는 쿠사마의 서명 같은 무늬입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점은 끝이 없어 보이고, 그 무한함이 우주를 덮겠다는 그녀의 말과 맞닿아 있어요.
호박은 쿠사마가 가장 사랑한 소재입니다. 노란 바탕에 검은 점이 박힌 호박은 어린 시절 농장에서 본 정겨운 형태에서 왔다고 해요. 그녀는 호박의 겸손하고 익살스러운 모양에서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무한 거울방(Infinity Mirror Room)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빛과 점을 채운 설치 작품이에요. 관객이 그 안에 들어서면 자신마저 무한히 반복되는 풍경의 일부가 됩니다. 미술관마다 줄을 서는 인기 작품이고, 보통 한 사람이 짧게 입장하는 식으로 운영돼요. 조각과 설치를 보는 법은 조각·설치·미디어아트 감상법에 따로 정리해뒀습니다.
뉴욕에서 도쿄로, 그리고 세계로
쿠사마는 1950년대 후반 뉴욕으로 건너가 아방가르드 미술의 한복판에서 활동했습니다. 점과 그물로 뒤덮은 회화, 거울 설치, 거리에서 벌인 퍼포먼스로 주목받았어요. 1970년대에 일본으로 돌아간 뒤로는 도쿄의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해, 지금까지도 병원과 인근 스튜디오를 오가며 작업을 이어갑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오랫동안 미술계 변방에 머물던 그녀는 1990년대 이후 다시 조명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습니다. 미술관 전시마다 긴 줄이 서고,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대중에게도 한층 가까워졌어요. 늦게 찾아온 영광이지만, 그 사이에도 작업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까
쿠사마의 작품 앞에서는 의미를 분석하려 애쓰기보다, 반복이 주는 감각을 그대로 느껴 보길 권해요. 압도되는 느낌, 빨려드는 몰입, 약간의 현기증까지가 모두 작품의 일부입니다. 추상적인 패턴 앞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막막하다면 추상화 감상법이 도움이 될 거예요.
다만 그 점 하나하나가 한 사람이 평생 불안과 마주하며 찍어 온 흔적이라는 맥락을 알고 보면, 같은 작품도 훨씬 깊이 다가옵니다. 화려한 포토존 너머에 한 예술가의 단단한 내면이 있는 셈이에요.
한 사람의 내면이 우주가 될 때
쿠사마 야요이는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가장 강력한 예술로 바꾼 작가입니다. 점이라는 작은 단위에서 출발해 방 하나를, 끝내 우주를 덮으려 한 그 집요함이 사람들을 사로잡아요. 한국 작가의 입문이 궁금하다면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뿌리로, 현대미술이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는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로 이어가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