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다음 방으로 들어섰는데 벽에 걸린 그림이 색면 하나, 또는 무수한 점, 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곡선과 사각형뿐일 때가 있습니다. 옆 사람은 한참을 들여다보고, 어떤 사람은 사진을 찍고 자리를 뜨는데 정작 본인은 무엇을 봐야 할지 막막하죠.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에서 추상화는 대상이 안 보임이라는 어려움을 가진다고 짚었었는데, 이번에는 그 어려움 앞에서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한 단계 깊게 들어갑니다. 추상화는 해독해야 하는 그림이 아니에요. 다섯 가지만 챙기면 추상화 앞에서 멈추지 않게 됩니다.

추상화는 무엇을 향한 추상인가요?

먼저 작은 오해부터 풀어둘게요. 추상화(Abstract Art)는 대상이 없는 그림이 아닙니다. 대상에서 추상한 그림이에요. 영어 단어 abstract는 뽑아내다, 추출하다라는 뜻에서 왔는데, 추상화 작가들도 무에서 시작하지 않고 현실의 어떤 본질을 뽑아내려 한 사람들이죠.

몬드리안의 격자는 나무에서 시작했고, 칸딘스키의 색면은 음악에서 시작했고, 폴록의 드리핑은 신체의 움직임에서 시작했어요. 추상화는 모든 구체성을 버린 그림이 아니라,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구체성을 버린 그림입니다.

이 출발점을 알면 추상화 앞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가 조금 명확해집니다. 작가가 무엇에서 출발해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면 되거든요. 색을 남겼는지, 선을 남겼는지, 행위의 흔적을 남겼는지, 공간의 비례를 남겼는지.

챙길 첫 번째: 색

추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색입니다. 그리고 추상화 작가들 대부분이 가장 의식적으로 다룬 요소도 색이에요. 색이 무엇을 표현하는가가 아니라, 색 자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작업한 사람들이거든요.

색을 볼 때 챙기면 좋은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추상화의 색을 볼 때
색의 온도
붉은기·노란기 같은 따뜻한 색인가, 푸른기·회색이 도는 차가운 색인가. 한 화면 안에서 두 톤이 어떻게 만나는지가 첫 인상의 핵심.
색의 채도
강렬한 원색인가, 회색이 섞인 부드러운 색인가. 추상화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요소.
색의 면적 비율
한 색이 화면의 80%를 차지하고 다른 색이 20%인가, 두 색이 5대 5로 맞붙는가. 같은 색이라도 면적이 다르면 전혀 다른 인상.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작업이 사람들을 압도하는 이유는, 그가 이 세 가지 색의 작동을 평생 연구한 작가였기 때문이에요. 그의 작품 앞에서는 왜 이 두 색이 만나는가를 묻기 전에, 그 만남이 만드는 몸의 반응을 느껴보세요.

챙길 두 번째: 형태와 구성

색 다음으로 챙기면 좋은 건 형태와 구성입니다. 추상화의 형태는 무엇을 닮은 모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모양이에요.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갈래로 나눠 보면 정리됩니다.

추상화의 두 가지 형태 결
기하 추상 (Geometric Abstraction)
사각형, 원, 직선, 격자 같은 명확한 기하 도형을 쓰는 작업. 몬드리안의 격자, 말레비치의 사각형, 한국의 단색화 일부가 이 결. 명료한 질서, 정제된 구조가 핵심.
표현적 추상 (Expressive Abstraction)
붓의 움직임·물감의 흐름·우연한 얼룩을 그대로 살리는 작업. 폴록의 드리핑, 데 쿠닝의 격렬한 붓질이 이 결. 행위의 흔적,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핵심.

같은 추상화라도 이 두 결은 완전히 다른 미적 경험을 줍니다. 기하 추상 앞에서는 화면의 비례와 균형을 보고, 표현적 추상 앞에서는 작가의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세요. 한 그림에서 두 결이 섞여 있다면, 그 긴장이 작업의 핵심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하 추상 Geometric Abstraction 명료한 질서, 정제된 구조 몬드리안, 말레비치, 단색화 보는 법: 비례와 균형 표현적 추상 Expressive Abstraction 행위의 흔적,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 폴록, 데 쿠닝, 추상표현주의 보는 법: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추상화의 두 큰 결. 같은 추상이라도 기하 추상은 화면의 비례와 균형을, 표현적 추상은 작가의 손이 만든 흔적과 에너지를 봅니다.

도식만 보면 두 결이 멀게 느껴지지만, 실제 명작 두 점을 나란히 두고 보면 차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피트 몬드리안, 빨강·파랑·노랑의 구성 II(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1930, 캔버스에 유화,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소장
피트 몬드리안, 빨강·파랑·노랑의 구성 II(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1930. 캔버스에 유화.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소장. 기하 추상의 정점. 검은 격자, 세 가지 원색, 비례의 균형만으로 화면 전체가 작동합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7(Composition VII), 1913, 캔버스에 유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모스크바) 소장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7(Composition VII), 1913. 캔버스에 유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모스크바) 소장. 표현적 추상의 대표작. 격렬한 색·곡선·중첩 속에서 작가가 음악적 리듬을 그림으로 옮기려 했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챙길 세 번째: 질감과 매체

추상화는 사진으로 보면 절반밖에 안 보이는 매체예요. 실제 전시장에서만 보이는 질감이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다음 같은 디테일이 보입니다.

추상화의 질감 관찰 포인트
물감의 두께
표면이 평평한가, 두꺼운 물감이 솟아 있는가. 임파스토 기법이라면 손가락이 만든 자국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붓 자국의 방향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그었는가, 여러 방향이 충돌하는가. 작가가 화면 앞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그대로 드러나요.
매체의 선택
유화·아크릴·수채화 외에 한지·마대·금속·모래 같은 비정형 재료를 쓴 경우도 많습니다. 매체 자체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해요.

매체가 익숙지 않다면 유화·아크릴·수채화 비교에서 세 가지 회화 재료의 특성을 정리해두었어요. 같은 추상화도 어떤 매체로 그려졌는지에 따라 질감의 결이 전혀 다릅니다.

챙길 네 번째: 작가의 맥락

추상화는 작가의 맥락 없이는 절반의 감상이 되기 쉽습니다. 캡션을 읽고 도록을 살펴보는 단계가 추상화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예요.

작가에 대해 알아두면 좋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추상화 작가의 맥락
어느 시기 사람인가
1910년대 추상은 최초로 대상을 없앤 충격이 핵심이었고,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는 전후 미국의 자유와 불안이 배경이에요. 같은 추상이라도 시대 맥락이 다릅니다.
어떤 사조 안에 있는가
기하 추상인가, 추상표현주의인가, 색면 추상인가, 단색화인가. 사조의 위치를 가늠하면 작가의 의도를 빠르게 잡을 수 있어요.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이 작가가 평생 어떤 질문에 답하려 했는지. 로스코는 색이 영혼에 닿을 수 있는가, 폴록은 그림이 행위가 될 수 있는가, 박서보는 반복이 비움이 될 수 있는가. 한 작가의 핵심 질문을 알면 모든 작품이 그 답이 됩니다.

미술관 전시 서문(보통 입구 벽의 큰 글)과 작품 캡션을 작품을 보기 전이 아니라 작품을 30초 본 후에 읽는 것을 권합니다. 먼저 내 눈의 반응을 받고, 그 다음에 작가의 맥락으로 그 반응을 다시 해석하는 순서가 좋아요.

챙길 다섯 번째: 머무는 시간

추상화 감상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입니다. 추상화는 구상화보다 훨씬 오래 머물러야 보이는 그림이에요.

구상화는 1분이면 무엇을 그렸는지 파악되고, 그 후로는 디테일을 더 깊이 보는 시간이 추가됩니다. 추상화는 1분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5분 후부터 색의 미세한 떨림이, 10분 후부터 화면 안의 리듬이 보이기 시작해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음 같은 세 단계 머무름입니다.

추상화 앞 세 단계 머무름
30초: 첫 인상
아무 정보 없이, 그저 화면 전체를 받아들이세요. 무엇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를 기억해두세요.
2~3분: 부분 관찰
가까이 가서 질감·붓 자국·물감의 두께를 봅니다. 그러고 두세 걸음 물러나 다시 전체를 봅니다.
5분 이상: 머무름
같은 자리에 서서 그냥 보세요. 무언가 떠오르면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반응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전시장에서 5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에요. 하지만 추상화는 그 5분의 머무름이 핵심입니다. 한 전시에서 5분 머문 작품 한 점이, 1분씩 본 50점보다 훨씬 오래 기억에 남아요.

추상화는 해독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면 좋을 점 하나. 추상화는 암호가 아닙니다.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숨겨두었고 관객은 그 메시지를 맞춰야 하는 게임이 아니에요.

추상화는 경험하는 그림에 가깝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이 음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추상화 앞에서도 이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 이 색이 내게 어떤 반응을 만드는가를 묻는 게 더 자연스러워요.

성향에 따라 추상에 더 끌리는 사람과 사실주의에 더 끌리는 사람이 있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MBTI 유형별 어울리는 미술 사조에서 왜 어떤 사람은 추상에 끌리고 어떤 사람은 사실에 끌리는지를 풀어두었으니, 본인의 결을 가늠해보고 싶다면 함께 보세요.

다음 미술관 방문 때 추상화 방에서 한 작품을 골라 5분 머물러 보세요. 그 5분이 추상화와 본인 사이의 첫 다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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