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 경매 소식에는 유독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그림이 100억 원을 넘겼다는 기사, 그 아래 거의 빠짐없이 적히는 이름, 김환기예요. 숫자는 화려한데 정작 "그래서 그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데?" 하고 물으면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죠.
게다가 그의 대표작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산이나 인물, 뚜렷한 풍경이 없습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건 무수한 점뿐이에요. 그 점들이 왜 그토록 귀하게 대접받는지, 김환기라는 사람을 처음부터 따라가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김환기는 누구인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화가입니다. 전라남도 신안의 섬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본 도쿄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서구에서 막 들어온 전위 미술과 추상을 만났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구상이 당연하던 시절에 형태를 지우는 실험을 시작한, 시대를 앞선 화가였죠.
광복 후에는 유영국을 비롯한 동료들과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첫 장을 함께 열었습니다. 이 1세대가 놓은 토대 위에서 훗날 1970년대 단색화가 자라났고요. 그러니 김환기를 안다는 건 한국 현대미술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늘 어딘가로 떠나는 여정이었어요. 신안에서 도쿄로, 다시 서울로, 파리를 거쳐 마지막엔 뉴욕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의 그림도 함께 달라졌습니다.
달항아리를 사랑한 화가
뉴욕의 점화에 닿기 전, 서울 시절의 김환기부터 만나 볼게요. 이 무렵 그의 화면에는 한국의 자연과 살림살이가 담겨 있습니다. 둥근 산과 밝은 달, 매화 가지, 그리고 무엇보다 백자 달항아리예요.
김환기는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유난히 아꼈습니다. 직접 여러 점을 곁에 두고 어루만지며 그렸다고 전해질 만큼요. 그는 달항아리의 둥글고 넉넉한 곡선에서 한국의 미를 봤어요.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이 아니라 살짝 기울고 이지러진 그 형태를,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읽은 겁니다.
눈여겨볼 점은 그가 이 소재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달항아리도 산도 달도, 최소한의 선과 면으로 단순하게 요약했습니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기는 대신 그것이 품은 정서와 리듬만 남긴 것, 이 태도가 훗날 형상을 완전히 지우는 점화로 이어지는 씨앗이 됩니다.
뉴욕, 그리고 점으로
1963년, 쉰 무렵의 김환기는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한국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화가였지만, 그 안정을 뒤로하고 세계 미술의 한복판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택했어요. 그리고 이 뉴욕 시절에 그의 그림은 마지막이자 가장 유명한 변신을 합니다.
그는 달항아리도 산도,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모두 지웠습니다. 남은 것은 점 하나였어요. 캔버스에 점을 찍고, 물감이 번지도록 두고, 그 점을 네모난 테두리로 감싸고, 다시 그 옆에 또 하나의 점을 찍고. 이 단순한 행위를 화면이 가득 찰 때까지 수천, 수만 번 되풀이했습니다. 이렇게 온 화면을 점으로 메운 그림을 전면점화라고 불러요.
멀리서 보면 점들은 푸른 안개나 밤하늘처럼 하나의 깊은 색면으로 어우러집니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제야 점 하나하나가, 번짐의 미세한 차이가 눈에 들어와요. 반복이 쌓아 올린 거대한 화면과 그 안의 작디작은 손길, 이 두 거리를 오가는 것이 점화를 보는 첫 번째 재미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의 점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제목부터 남다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어요. 그림에 시의 언어를 얹은 셈이죠. 그는 이 작품으로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제목을 알고 나면 화면의 점들이 달리 보여요. 뉴욕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점 하나하나는 두고 온 고향의 얼굴이자 그리운 이름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대표작 〈우주(Universe) 05-IV-71 #200〉는 그가 남긴 가장 큰 그림이자 유일한 두 폭짜리 작품이에요. 뉴욕에서 고향의 하늘을 그리워하며 그린 이 그림은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2억 원에 팔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이 시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국 블루칩 작가에서 더 자세히 짚어 두었어요.
김환기, 어떻게 감상할까
점화 앞에 서면 처음엔 막막할 수 있어요. 무엇을 그린 건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럴 때 딱 두 가지만 기억하면 그림이 한결 가까워집니다.
- 거리를 두고, 또 다가서서
- 멀찍이서는 점들이 함께 만드는 색과 깊이를, 바짝 다가서서는 점 하나하나의 번짐과 떨림을 보세요. 같은 그림이 두 개의 얼굴을 갖습니다.
- 반복을 그리움으로
- 수만 번의 점은 기계가 찍은 무늬가 아니라 손으로 하나씩 눌러 담은 시간이에요. 그 반복이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지 떠올려 보세요.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형상이 없는 그림은 무엇처럼 보이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느껴지는지가 전부니까요. 추상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면 추상화 감상법을 먼저 읽고 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거예요.
어디서 만날 수 있나
김환기의 그림을 실물로 보고 싶다면 두 곳을 기억해 두세요.
먼저 서울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입니다. 1992년 그의 부인 김향안이 세운 곳으로, 김환기의 작품과 자료를 상설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점화의 실제 크기와 번짐의 질감은 화면으로는 절반도 전해지지 않으니, 한 번쯤 직접 찾아가 볼 만합니다.
또 한 곳은 국립현대미술관이에요. 2021년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김환기의 작품 여러 점이 국가 소장품이 됐거든요. 상설관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소장품전이나 특별전에서 번갈아 공개되니, 방문 전에 일정을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기증이 무엇이었는지는 이건희 컬렉션에 정리해 두었어요.
경매 기사의 숫자로만 알던 이름이 조금 가까워졌다면, 다음엔 화면 밖에서 그의 점 앞에 서 볼 차례예요. 무수한 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문득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김환기는 어떤 화가인가요?
1913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입니다. 도쿄 유학 시절 추상을 접했고, 광복 후 유영국 등과 신사실파를 이끌었어요. 서울 시절에는 달항아리와 산·달을 단순한 형태로 그렸고, 뉴욕으로 건너간 뒤에는 화면을 점으로 가득 채운 전면점화에 이르렀습니다(1913~1974).
전면점화가 무엇인가요?
형상을 모두 지우고 화면 전체를 점으로만 채운 김환기 후기의 추상 회화예요. 캔버스에 점을 찍고 번지게 둔 뒤 네모로 감싸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멀리서 보면 점들이 하나의 깊은 색면처럼 어우러집니다. 뉴욕 시절인 1970년대 초에 완성한 그의 대표 양식이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무슨 뜻인가요?
김환기의 1970년 점화 작품 제목으로,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뉴욕에서 홀로 지내며 두고 온 고향과 사람들을 그리워한 마음이 담겨 있어요. 이 작품은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김환기 작품은 왜 그렇게 비싼가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미술사적 위상에, 작품 수가 한정된 희소성이 더해졌기 때문이에요. 2019년 〈우주 05-IV-71 #200〉가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2억 원에 팔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죠. 시장에서의 위치는 한국 블루칩 작가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김환기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서울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에서 상설로 만날 수 있습니다. 1992년 부인 김향안이 세운 곳으로, 김환기의 작품과 자료를 폭넓게 소장하고 있어요. 2021년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여러 점이 들어와, 소장품전이나 특별전에서 번갈아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