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한 화가의 방을 연이어 지나다 보면, 앞방과 뒷방의 그림이 같은 사람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가 그런 경우예요. 파라솔 그늘에 앉아 웃는 젊은 여자를 그린 사람과, 시골집 벽에 검은 그림을 남긴 사람이 같은 이름을 씁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의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가 2026년 6월 26일부터 9월 30일까지 열립니다. 고야를 국내에서 단독으로 조망하는 첫 전시이고,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 80점이 국내에 처음 나왔어요. 관람 정보와 다른 가을 전시와의 순서는 2026 가을 전시, 어디부터 갈까요에 있으니, 여기서는 고야라는 사람을 처음부터 따라가 볼게요.

파라솔 아래, 밝은 쪽에서 출발합니다

고야가 화가로서 먼저 자리를 잡은 일은 태피스트리 밑그림이었습니다. 1775년 무렵부터 마드리드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해 그렸고, 그 수가 60점을 넘어요. 밑그림이라고 하면 연필 스케치가 떠오르지만, 직조공이 보고 실로 옮길 수 있도록 색까지 다 올린 그림이었습니다.

소재는 소풍과 놀이, 장터 같은 일상이었어요. 왕실 거처를 장식할 태피스트리였으니 밝고 기분 좋은 장면이 필요했고, 고야는 그 주문에 아주 잘 맞는 화가였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파라솔(El Quitasol), 1777년, 유화,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프란시스코 고야, 〈파라솔〉, 1777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볕은 왼쪽 위에서 들어오는데 정작 얼굴은 파라솔의 그늘 안에 있고, 그 그늘이 초록빛을 띱니다. 빛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빛을 가린 자리를 그린 그림인 셈이에요.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고야 한눈에
전체 이름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태어난 해와 곳
1746년 3월 30일,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
세상을 떠난 해와 곳
1828년 4월 16일, 프랑스 보르도. 여든둘이었습니다
궁정에서의 자리
1786년 국왕의 화가, 1799년 수석 궁정화가
화면이 갈라진 해
1792년. 큰 병을 앓고 청력을 잃었습니다
대표 연작
판화 〈카프리초스〉 80점, 〈전쟁의 참화〉 82점, 벽에 그린 '검은 그림들' 14점

벨라스케스를 판으로 옮기며, 궁정의 꼭대기까지

1778년 고야는 왕실이 가지고 있던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동판화로 옮기는 연작에 매달립니다. 남의 그림을 베끼는 일처럼 보이지만, 유화를 선과 농담으로 바꾸려면 원화를 한 뼘씩 뜯어볼 수밖에 없어요. 고야는 이 과정에서 벨라스케스에게 배웠고, 훗날 자신의 스승으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 어둠에서 꺼낸 빛, 그리고 자연을 꼽았다고 전해집니다. 베껴진 쪽의 이야기는 벨라스케스, 화가 중의 화가에 따로 정리해 뒀어요.

궁정에서의 자리도 차근차근 올라갔습니다. 1786년 국왕의 화가, 1799년 수석 궁정화가(primer pintor de cámara). 스페인 화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그 정점에서 그린 것이 〈카를로스 4세 가족〉(1800~01)입니다. 프라도에 있는 큰 단체 초상인데, 왕가를 이상화하지 않고 그렸다는 평가를 오래 받아 왔어요. 자리를 준 이들을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후의 고야를 미리 보여줍니다.

1792년, 소리가 사라진 뒤

1792년 말, 고야는 큰 병을 앓습니다. 회복한 뒤에도 청력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병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비극의 클라이맥스처럼 다루는 설명이 흔한데, 이후의 경력을 보면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궁정 일은 계속했고 수석 궁정화가가 된 것도 이 일을 겪은 뒤예요. 달라진 것은 비중이었습니다. 주문받아 그린 그림 옆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만든 화면이 눈에 띄게 늘어나거든요. 화면이 어두워지고 관찰이 안쪽으로 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들리지 않게 된 뒤의 고야가 늘린 것은 주문서가 아니라,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그림이었습니다.

〈카프리초스〉, 판화로 한 말

1799년 고야는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80점을 내놓습니다. 에칭과 애쿼틴트를 겹쳐 찍은 판화예요. 선을 긋는 기법과 면에 회색조를 까는 기법을 포개면, 먹을 쓴 것 같은 어두운 면과 날카로운 선이 한 화면에 옵니다. 기법 이름이 낯설다면 판화, 복제품 아닌가요?를 먼저 보셔도 좋아요.

내용은 미신과 위선, 허영에 대한 풍자였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43번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예요. 책상에 엎드려 잠든 사람 뒤로 올빼미와 박쥐가 몰려드는 한 장면이고, 예술의전당 전시의 제목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그리 오래 팔지는 못했어요. 고야는 발매 직후 판매를 중단했는데, 종교재판을 의식했다고 전해집니다. 1803년에는 동판과 남은 재고를 국왕에게 넘기고 대신 아들의 연금을 받았고요.

같은 자세의 인물을 옷을 벗은 모습과 입은 모습으로 각각 그린 〈옷 벗은 마하〉(1795~1800년경)와 〈옷 입은 마하〉(1800~08년경) 한 쌍도 이 무렵의 그림입니다. 모델이 누구인지는 확인된 바가 없어요. 고야는 1815년 이 누드화 문제로 종교재판소에 불려 갔는데, 그 뒤의 기록은 소상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영웅담 없이 그리다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에 들어오면서 반도전쟁이 시작됩니다. 1814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을 고야는 큰 그림 두 점으로 남겼어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둘 다 1814년에 그렸고 프라도에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 1814년, 유화,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총을 든 쪽은 등만 보인 채 얼굴이 지워져 있고, 흰 셔츠를 입고 두 팔을 든 남자에게만 얼굴과 빛이 주어졌습니다. 누구를 보게 할지 정해 두는 것이 이 화면의 설계예요.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 그림이 미술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얻은 이유는 소재가 아니라 태도에 있습니다. 그때까지 전쟁을 다룬 큰 그림은 대개 이긴 쪽의 영웅을 한가운데 세웠어요. 고야는 그 자리를 이름 없는 사람에게 내주고, 총을 든 쪽은 등만 보이도록 돌려세웠습니다. 승리도 명분도 화면에 없고 남는 것은 상황뿐인데, 근대 전쟁화의 원형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같은 시기에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 82점도 새겼습니다. 1810년 무렵부터 1820년 무렵까지 이어진 작업인데 생전에는 출판하지 않았고, 사후 한참 지난 1863년에야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가 처음 펴냈어요. 내놓을 자리가 없는 상태로 10년 가까이 손을 놓지 않은 셈입니다.

벽에 그린 검은 그림, 그리고 보르도의 돌

1819년 고야는 마드리드 외곽의 시골집 한 채를 삽니다. 이 집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의 집이라는 뜻으로 '킨타 델 소르도'라 불렸어요.

그는 이 집의 벽에 1823년 무렵까지 직접 유화를 그렸습니다. 주문도 없고 전시할 계획도 없는 14점, 오늘 '검은 그림들'이라 부르는 연작이에요. 제목도 고야가 아니라 후대가 붙였고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자리를 빼앗기리라는 예언 때문에 아이들을 삼켰다는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인데, 화면에는 신전도 위엄도 없어요. 개의 머리 하나만 남긴 〈개〉처럼 설명을 거의 지운 화면도 이 연작에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1870년대에 벽에서 캔버스로 옮겨졌고, 1881년 프라도에 기증돼 지금도 그곳에 있어요.

1824년, 자유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던 국면에서 고야는 요양을 명목으로 허가를 받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나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그리고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당시 신기술이던 석판화를 배워 〈보르도의 황소들〉(1825) 연작을 만들어요. 돌 위에 유성 재료로 직접 그리는 방식이라 동판을 파고 부식시키는 것보다 붓질에 가깝습니다. 평생 판을 다뤄 온 사람이 마지막에 가장 회화에 가까운 판화를 골랐다는 점이 흥미롭죠.

마네와 피카소가 이어받은 것

밝음에서 어둠으로, 고야의 반세기 칸 색은 그 시기 화면의 밝기입니다 태피스트리 청력 상실 카프리초스 전쟁 검은 그림 보르도 1775~ 1792 1799 1808~14 1819~23 1824~28 밝은 일상 병과 침묵 풍자 판화 전쟁의 기록 벽 위의 유화 돌 위의 그림 화면이 갈라지는 자리는 1792년입니다 가장 어두운 칸은 마지막이 아니라 끝에서 두 번째입니다
고야가 지나온 여섯 국면을 화면 밝기로 옮긴 개념 도식입니다. 실제 작품의 색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시기별 인상을 여섯 단계로 나눈 것이에요. 눈여겨볼 곳은 맨 끝입니다. 가장 어두운 칸이 마지막이 아니라 끝에서 두 번째라는 것, 그러니까 벽에 검은 그림을 남긴 뒤에도 낯선 도시에서 새 기술을 하나 더 배웠다는 뜻이거든요.

고야의 화면은 스페인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마네, 살롱을 떠나지 않은 혁명가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8~69)에서 〈5월 3일〉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어요. 총을 든 쪽과 총 앞에 선 쪽을 마주 세우는 배치가 그렇습니다.

한 세대를 더 건너가면 피카소, 매번 다시 시작한 화가의 〈게르니카〉(1937)가 있습니다. 전쟁을 증언하는 스페인 회화라는 계보로 두 그림을 함께 묶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 계보의 출발점에 놓이는 이름이 고야예요.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의 마지막 날은 2026년 9월 30일입니다. 전시장은 여섯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서, 구역을 옮길 때마다 화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만 따라가도 위의 도식을 눈으로 확인하게 돼요. 큰 전시를 인파 속에서 도는 요령은 대형 거장전, 어떻게 봐야 할까요?에 따로 적어 뒀습니다.

고야를 한 문장으로 줄이기는 어렵습니다. 밝은 쪽에서 출발해 어두운 쪽으로 걸어간 사람이라고 말해 버리면, 일흔이 넘어 낯선 도시에서 새 기술을 배운 대목이 설명되지 않거든요. 대신 이렇게 보셔도 좋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고쳐 그리지 않은 화가였고, 그저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이 달라졌을 뿐이라고요.

자주 묻는 질문

고야는 어떤 화가인가요?

1746년 스페인 아라곤에서 태어나 1828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입니다.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의 밝은 밑그림으로 출발해 1799년 수석 궁정화가까지 올랐고, 말년에는 시골집 벽에 '검은 그림들'을 남겼어요. 한 사람의 화면이 이렇게까지 달라진 사례가 드뭅니다.

고야전은 언제까지 하나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의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는 2026년 6월 26일에 시작해 2026년 9월 30일에 끝납니다. 고야를 국내에서 단독으로 조망하는 첫 전시이고, 관람 시간과 예매 방식은 예술의전당 공식 안내에서 확인하세요.

〈카프리초스〉는 어떤 작품인가요?

1799년에 발표한 에칭과 애쿼틴트 판화 연작 80점입니다. 미신과 위선, 허영을 풍자한 내용이에요. 43번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책상에 엎드려 잠든 사람 뒤로 올빼미와 박쥐가 몰려드는 장면입니다.

고야의 '검은 그림들'은 무엇인가요?

1819년에 산 마드리드 외곽 집의 벽에 1823년 무렵까지 직접 그린 유화 14점을 가리킵니다. 주문도 전시 계획도 없는 그림이었어요. 제목은 고야가 아니라 후대가 붙였고, 1870년대에 캔버스로 옮겨져 1881년 프라도 미술관에 기증됐습니다.

고야 작품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대표작 대부분이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모여 있습니다. 〈파라솔〉과 〈카를로스 4세 가족〉,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 〈1808년 5월 3일〉, 그리고 '검은 그림들'까지 한자리에서 이어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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