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는 사람이 유난히 오래 머무는 방이 있습니다. 세로 3.2미터에 가로 2.8미터, 벽 하나를 차지하는 그림 한 점 앞이에요. 그린 사람은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왕궁에서 37년을 보낸 화가입니다.
세비야의 부엌에서 시작한 그림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는 1599년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태어났습니다. 6월에 세례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는데 정확한 생일은 전해지지 않아요. 소년 시절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공방에 들어갔고, 1618년에는 스승의 딸 후아나와 결혼합니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것은 신화도 성인도 아니었습니다. 부엌과 선술집이었어요. 계란을 부치는 노파, 물을 파는 남자 같은 장면을 스페인에서는 '보데곤'(bodegón)이라고 부릅니다. 1618년의 〈계란을 부치는 노파〉(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와 그 무렵의 〈세비야의 물장수〉(런던 앱슬리 하우스)가 이 시절의 이름난 예예요.
화면은 어둡습니다. 배경을 검게 지우고 옆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사람과 그릇만 끄집어내는 방식인데, 이 화법은 로마에서 시작돼 판화와 모사본을 타고 세비야까지 퍼져 있었어요.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지만, 젊은 벨라스케스의 어둠은 카라바조, 빛 한 줄기가 만든 무대에서 출발한 흐름 위에 놓입니다. 같은 흐름이 북쪽으로 건너간 결과가 렘브란트, 어둠에서 꺼낸 빛이고요.
- 태어난 해와 곳
- 1599년, 스페인 세비야. 6월에 세례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세상을 떠난 해
- 1660년 8월 6일, 마드리드. 예순한 살이었습니다
- 직업
- 1623년부터 1660년까지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 37년입니다
- 가장 유명한 그림
- 1656년 〈시녀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 가장 잘한 것
- 가까이서는 성긴 붓자국이다가 물러서면 형태가 맺히는 화법
- 남긴 양
- 현존 작품 120점 안팎. 거장치고는 유난히 적습니다
스물넷에 궁으로 들어가다
1622년 그는 마드리드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23년,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돼요. 스물넷이었습니다. 왕은 열여덟이었고요.
이 임명이 남은 인생을 정했습니다. 16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년, 그는 궁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린 대상도 대부분 궁 안에 있었습니다.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그리고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광대와 왜소증을 가진 시종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궁정에서 이들은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자리에 있었는데, 벨라스케스의 화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세바스티안 데 모라〉처럼 왕족을 그릴 때와 같은 정면, 같은 진지함으로 그렸습니다. 조롱이 빠져 있는 이 시선이 후대에 특히 높이 평가받는 대목이에요.
큰 그림도 맡았습니다. 1634년에서 1635년 사이에 그린 〈브레다의 항복〉은 부엔 레티로 궁의 '왕국들의 방'을 채우기 위한 대작이었어요.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인데 승자인 스피놀라가 패장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배경에 창이 빽빽이 늘어서 있어서 '라스 란사스', 곧 창들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려요.
로마에서 그린 두 얼굴
1628년에서 1629년 사이 루벤스가 마드리드를 방문합니다. 두 화가는 교류했고, 루벤스는 그에게 이탈리아에 가 볼 것을 권했어요. 벨라스케스는 1629년부터 1631년까지, 그리고 1649년부터 1651년까지 두 차례 이탈리아에 머뭅니다.
두 번째 체류 중 로마에서 그린 것이 1650년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입니다. 붉은 옷과 붉은 휘장 속에서 교황의 눈이 이쪽을 마주 보는 그림인데, 교황 자신이 "너무 사실적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20세기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초상을 변주한 교황 연작을 여러 점 그렸어요. 원작은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 있습니다.
같은 로마 체류기에 그린 또 한 점이 조수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입니다. 1650년 판테온에서 열린 전시에 이 그림을 내놓았어요. 파레하는 당시 노예 신분이었고, 벨라스케스는 그해 로마에서 그의 해방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문서의 효력은 몇 해 뒤에 발생했고, 파레하는 그 뒤 독립한 화가로 활동했어요. 이 초상은 1970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미술품 경매 최고가인 약 550만 달러에 낙찰됐고, 그 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이 됐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거울 앞의 비너스〉(1647~1651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는 종교재판의 시대 스페인에서 나온 그림치고 예외적입니다. 그가 남긴 여성 누드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한 점이에요. 1914년 여성 참정권 운동가 메리 리처드슨이 칼로 그은 뒤 복원됐습니다.
〈시녀들〉, 화가가 화면 안에 있는 그림
1656년에 그린 〈시녀들〉은 세로 3.2미터에 가로 2.8미터쯤 되는 대작입니다. 가운데에 마르가리타 공주, 양옆에 시중드는 시녀들, 오른쪽 뒤로 수행원들이 있어요. 왼쪽 끝에는 뒷면만 보이는 커다란 캔버스와 붓을 든 벨라스케스 자신이 서 있고요.
이상한 점은 뒷벽에서 시작됩니다. 거기 걸린 거울 안에 국왕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가 비쳐요. 그리는 사람은 화면 안에 있는데, 그려지는 대상인 왕 부부는 화면 어디에도 없고 거울에만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왕 부부가 서 있는 자리는 화면 밖이고, 그 자리는 지금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선 바로 그 자리예요.
화가의 가슴에도 볼 것이 있습니다. 붉은 산티아고 기사단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그가 서임된 것은 그림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난 1659년이에요. 나중에 덧그려진 것이죠. 국왕이 직접 붓을 들어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해지지만, 그쪽은 전승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흔히 하는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바짝 붙어서 보는 거예요. 벨라스케스의 화면은 가까이 갈수록 형태가 풀어집니다. 공주의 드레스 자락도 시녀의 머리 장식도, 코앞에서는 성긴 붓자국 몇 개로만 보여요. 몇 걸음 물러서야 그것들이 비단과 리본으로 맺힙니다.
화가이자 관료로 보낸 마지막 해
궁에서 그가 한 일은 그림만이 아니었습니다. 1652년 벨라스케스는 '아포센타도르 마요르', 곧 왕의 행차와 숙소와 의식을 챙기는 왕실 의전 총괄직에 오릅니다. 화가에게는 시간을 크게 빼앗기는 자리였죠. 평생 남긴 작품이 120점 안팎으로 유난히 적은 데에는 이런 사정도 겹쳐 있습니다.
1660년 6월,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혼인합니다. 두 나라 국경의 '꿩의 섬'에서 열린 이 의식을 총괄한 사람이 벨라스케스였어요. 마드리드로 돌아온 그는 병을 얻었고, 그해 8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순한 살이었어요.
화가 중의 화가라는 이름
뒤에 온 화가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오래 서 있었습니다.
1778년, 고야는 왕실이 소장한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동판화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손으로 다시 그리며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훗날 그는 자신의 스승으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와 자연을 꼽았다고 전해집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고야, 궁정의 빛에서 검은 그림까지에서 이어 보세요.
1865년에는 마네가 마드리드의 프라도를 찾습니다. 돌아와 친구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벨라스케스를 화가 중의 화가라고 불렀어요. 이 글의 제목이 거기서 왔습니다. 가까이서는 붓자국이다가 물러서면 형태가 맺히는 화법이 두 세기 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다시 발견된 셈이죠. 그 내력은 마네, 살롱을 떠나지 않은 혁명가에 있어요.
1957년에는 피카소가 〈시녀들〉 한 점을 58점으로 늘려 놓습니다. 같은 구도를 계속 바꿔 그린 변주 연작이고, 지금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어요. 피카소, 매번 다시 시작한 화가에서 그의 다른 얼굴들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프라도에 갈 일이 생긴다면 〈시녀들〉 앞에서 두 번 서 보세요. 한 번은 가까이에서 붓자국을 보고, 한 번은 방 뒤쪽까지 물러나서 화면 전체를 봅니다. 두 번째 자리가 바로 거울 속 국왕 부부가 섰던 자리예요. 400년 전 화가가 관람자에게 미리 마련해 둔 자리이기도 하고요.
자주 묻는 질문
벨라스케스는 어떤 화가인가요?
1599년 세비야에서 태어난 스페인 화가입니다. 스물넷이던 1623년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돼 16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년을 궁에서 일했어요. 〈시녀들〉과 〈브레다의 항복〉을 남겼고, 현존 작품은 120점 안팎으로 많지 않습니다.
〈시녀들〉은 왜 유명한가요?
그리는 화가가 화면 안에 들어가 있고, 그려지는 대상인 국왕 부부는 뒷벽 거울에만 비치는 구조 때문입니다. 왕 부부가 선 자리는 화면 밖, 지금 그림을 보는 사람이 선 자리와 겹쳐요. 이 구조 덕분에 회화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그림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벨라스케스 그림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입니다. 〈시녀들〉과 〈브레다의 항복〉이 여기 있어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은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후안 데 파레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거울 앞의 비너스〉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습니다.
후안 데 파레하는 누구인가요?
벨라스케스의 공방에서 일한 조수이고, 초상이 그려진 1650년 당시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그해 로마에서 해방 문서에 서명했고 효력은 몇 해 뒤에 발생했어요. 파레하는 그 뒤 독립한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마네는 왜 벨라스케스를 화가 중의 화가라고 불렀나요?
마네는 1865년 마드리드 프라도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직접 보고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돌아와 친구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화가 중의 화가라고 불렀어요. 가까이서는 성긴 붓자국으로 보이다가 물러서면 형태가 맺히는 화법이 특히 19세기 화가들을 사로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