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이 그림 앞에 서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침대에 누운 여성이 관객을 똑바로 보고 있거든요. 부끄러워하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아요. 1865년 파리 살롱에 이 그림이 걸렸을 때 사람들이 화를 낸 이유가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관객을 똑바로 본 그림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는 1832년 파리에서 태어나 1883년 같은 도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쉰한 해의 생애였어요.
1865년 살롱에 그가 낸 그림이 〈올랭피아〉입니다. 구도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어요.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가져온, 누워 있는 여성이라는 오래된 형식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자리에 놓인 사람이 여신이 아니라 당대 파리를 살아가는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신화라는 알리바이가 사라지자 그림은 갑자기 불편해졌습니다. 관객은 여신을 감상하는 대신, 자기를 마주 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어요. 비난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작품이 상할까 봐 그림을 높이 옮겨 걸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상화를 걷어낸 누드라는 점에서 이 그림은 고야 〈옷 벗은 마하〉가 앞서 연 계보 위에 놓인다고 읽히곤 해요. 그 화가의 생애는 고야, 궁정의 빛에서 검은 그림까지에 따로 있습니다. 그림 속 모델은 빅토린 뫼랑으로, 마네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 직업 모델이자 훗날 자기 그림을 그린 화가이기도 했어요.
법조 집안의 아들이 낙선전에 서기까지
마네는 파리의 유복한 법조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법무부의 고위 관료였고, 집안은 아들이 당연히 법조인이 되리라 여겼어요.
정작 소년은 다른 쪽을 봤습니다. 해군사관 시험을 두 번 치렀지만 모두 떨어졌고, 1848년부터 이듬해까지는 견습 선원으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다녀오기도 했어요. 그러고 나서야 화가가 되겠다는 허락을 받아냅니다. 1850년부터 6년 동안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 배웠고, 루브르에 살다시피 하며 옛 거장을 베꼈습니다. 특히 그를 붙든 것은 스페인 회화였어요. 1861년 살롱에서는 〈스페인 가수〉로 가작을 받으며 첫 공식 인정도 받았죠.
그리고 1863년, 살롱이 유난히 많은 작품을 떨어뜨립니다. 불만이 커지자 나폴레옹 3세가 낙선한 그림들을 따로 모아 보여주도록 했어요. 이것이 낙선전(Salon des Refusés)입니다. 여기 걸린 마네의 그림이 〈풀밭 위의 점심〉, 당시 제목으로는 '목욕'이었습니다.
숲속에 정장 차림의 남자 둘이 앉아 있고, 그 옆에 옷을 벗은 여성이 관객 쪽을 보고 있는 장면이죠. 구도는 마네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새긴 라이몬디의 판화에서 한 부분을 그대로 가져왔거든요. 옛 거장의 반듯한 구도에 당대의 인물을 앉힌 것, 바로 이 충돌이 논점이었습니다. 신화 속이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장면이 파리 근교의 숲으로 옮겨지는 순간 견디기 어려운 그림이 된 거예요.
스페인이라는 학교
1865년 8월, 〈올랭피아〉로 한창 시달리던 마네는 마드리드로 떠납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가 만난 것은 벨라스케스였어요.
그는 친구 팡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벨라스케스를 "화가 중의 화가"라고 적었습니다. 특히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앞에서는 배경이 사라지고 인물을 공기가 감싸는 것 같다는 취지의 감탄을 남겼죠. 이 화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벨라스케스, 화가 중의 화가에 따로 정리돼 있어요.
돌아온 이듬해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을 보면 무엇을 배워 왔는지 분명해집니다. 배경에 방도 바닥도 없어요. 소년 한 명과 그를 둘러싼 빈 공간뿐입니다. 깊이를 파고드는 대신 화면을 평평하게 두는 이 선택이 이후 회화가 걸어갈 방향을 미리 보여줬다고들 하죠. 이 그림 역시 1866년 살롱에서는 떨어졌습니다.
정치적인 주제도 피하지 않았어요. 멕시코에서 처형된 막시밀리안 황제를 다룬 그림이 그렇습니다. 고야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참조해 여러 버전으로 그렸는데, 프랑스 정부의 책임을 건드리는 주제였던 탓에 당대 프랑스에서는 전시도 석판화 유통도 막혔습니다.
- 〈풀밭 위의 점심〉 (1863)
- 파리 오르세 미술관. 낙선전에 걸려 스캔들이 된 그림
- 〈올랭피아〉 (1863)
- 파리 오르세 미술관. 1865년 살롱 출품작
- 〈피리 부는 소년〉 (1866)
- 파리 오르세 미술관. 배경을 지운 벨라스케스식 화면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69)
- 여러 버전 가운데 최종본은 독일 만하임 미술관
-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
- 런던 코톨드 갤러리. 살롱에 낸 마지막 대작
카페 게르부아의 맏형
1860년대 후반,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에 젊은 화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네와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바지유 같은 이름들이었어요. 이른바 바티뇰 그룹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마네가 있었습니다.
팡탱라투르가 1870년에 그린 〈바티뇰의 아틀리에〉가 이 무리의 단체 초상이에요. 이젤 앞에 마네가 앉아 붓을 들고 있고, 그 둘레에 동료들이 서 있습니다. 누가 중심인지 한눈에 보이는 배치죠.
그렇다고 스승은 아니었습니다. 화실을 열어 제자를 기르지도 않았어요. 다만 떨어지고 조롱받으면서도 계속 새로운 화면을 밀어붙인 전례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지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 무리에서 사람을 가장 즐겁게 그린 화가가 르누아르, 기쁨의 편에 선 화가예요. 마네의 〈발코니〉에 모델로 등장한 베르트 모리조는 1874년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해 가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상파전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어요
1874년 봄, 이 무리는 아카데미 바깥에서 자기들끼리 전시를 엽니다. 훗날 인상주의라 불리게 될 그 자리예요. 이 전시는 1886년까지 모두 여덟 번 있었습니다.
마네는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거예요. 젊은 화가들을 모은 사람도, 그들이 따라간 화면을 먼저 그린 사람도 마네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싸울 곳이 살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밖에 나가 따로 판을 벌이면 제도는 그대로 남고 자기들만 변두리가 된다고 본 거죠. 그래서 떨어지면 다시 냈고, 조롱받으면 또 냈습니다.
그렇다고 동료들과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에요. 1874년 여름 그는 아르장퇴유에서 모네 곁에 이젤을 폈고, 그 시기를 지나며 팔레트가 눈에 띄게 밝아졌습니다. 배 위에 작업실을 꾸린 모네를 그린 〈배 위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가 그때의 기록이죠. 형편이 어렵던 모네를 금전적으로 돕기도 했고요. 빛을 좇은 이 친구의 이야기는 모네, 빛을 그린 사람에 따로 있어요.
거리를 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드가, 무대 뒤를 그린 관찰자는 인상파전을 함께 조직하고도 '인상주의'라는 이름만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죠. 마네는 반대로 이름에는 개의치 않으면서 전시 자체에 나가지 않았고요. 한 세대가 같은 문제를 저마다 다르게 풀었던 셈입니다.
마지막 대작, 그리고 그 뒤
1881년 마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습니다. 오래 밀어내던 제도가 마침내 그를 받아들인 신호였어요. 그리고 이듬해 살롱에 마지막 대작을 냅니다. 〈폴리베르제르의 바〉예요.
그림 앞에서 한 번쯤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대목이 있어요. 쉬종이라는 이름의 바메이드가 정면을 보고 서 있는데, 등 뒤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밀려나 손님과 마주하고 있죠. 실수라기보다는, 관객이 선 자리와 그림이 보여주는 자리가 어긋나도록 일부러 짜 놓은 구도로 읽힙니다. 관객을 똑바로 봤던 〈올랭피아〉에서 스무 해 가까이 지나, 마네는 다시 한번 보는 사람의 자리를 흔들어 놓은 셈이에요.
말년의 그는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으로 오래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1883년 4월, 쉰한 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떠난 뒤 나선 사람은 모네였습니다. 동료와 지지자들에게서 돈을 모아 〈올랭피아〉를 사들인 다음 1890년 프랑스 국가에 기증했고, 그림은 뤽상부르 미술관을 거쳐 1907년 루브르에 들어갑니다. 오르세 미술관 소장품이 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에요. 파리를 발칵 뒤집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 국가 소장품이 되기까지, 사반세기가 걸린 셈입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이렇게 묘한 구석이 있어요. 그는 인상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한 적이 없고 인상파전에 걸린 적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살롱에 그림을 계속 밀어 넣으며 벌려 둔 틈으로 다음 세대가 걸어 나갔죠. 19세기 회화의 큰 흐름이 궁금하다면 미술 사조, 5분 만에 따라잡기를 함께 보셔도 좋아요.
언젠가 〈올랭피아〉 앞에 서게 되거든 한 가지만 해 보세요. 그림 속 시선을 피하지 말고 잠시 마주 보는 겁니다. 1865년의 관객들이 끝내 견디지 못했던 것이 정확히 그 눈맞춤이었거든요.
자주 묻는 질문
마네와 모네는 어떻게 다른가요?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기 쉽지만 다른 사람입니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도시의 사람과 실내 장면을 주로 그렸고 평생 살롱에 출품했어요.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야외로 나가 빛의 변화를 좇았고 1874년 첫 인상파전을 함께 열었습니다. 마네는 인상파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죠.
올랭피아는 왜 논란이 됐나요?
1865년 살롱에 걸린 이 그림이 여신이나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당대 파리를 살아가는 여성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화면 속 인물이 관객을 똑바로 마주 봐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시선을 되돌려 주는 사람이 된 셈이죠. 비난이 격렬해 작품이 상할까 봐 그림을 높이 옮겨 걸었다고 전해집니다.
마네는 왜 인상파전에 나가지 않았나요?
싸울 곳은 살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여덟 번 열린 인상파전에 마네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아카데미 밖에 따로 판을 벌이는 대신 제도 안에 계속 출품하며 화면을 바꾸려 했습니다. 낙선과 혹평을 거듭 겪으면서도 이 원칙만은 지켰어요.
풀밭 위의 점심은 무엇이 문제였나요?
1863년 낙선전에 걸린 이 그림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 옆에 옷을 벗은 여성이 앉아 관객 쪽을 보는 장면입니다. 구도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새긴 라이몬디 판화에서 가져왔어요. 옛 거장의 반듯한 구도에 당대의 인물을 앉힌 충돌이 당시 관객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마네 작품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대표작 다수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 〈에밀 졸라의 초상〉이 모두 이곳 소장이에요. 마지막 대작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런던 코톨드 갤러리에 있습니다. 전시 구성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