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로비 정면, '램프코어'라 불리는 공간에 텔레비전 모니터를 층층이 쌓은 탑이 서 있습니다.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이에요. 모니터 1,003대, 높이 18.5m. 탑을 감싼 나선형 경사로를 오르는 동안 화면이 눈높이로, 다시 발아래로 지나갑니다.
1988년 9월 15일 처음 불을 밝힌 탑은 2018년 2월 안전 문제로 멈췄다가, 3년간의 보존·복원을 거쳐 2022년 9월 15일 다시 켜졌어요.
그런데 이 탑을 세운 사람은 처음엔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2026년, 그가 피아노에서 텔레비전과 위성으로 건너간 길을 따라가 볼게요.
음악에서 시작한 사람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나, 10대에 피아노와 새 음악을 배우며 쇤베르크를 접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일본으로 피난했고, 1952년 도쿄대학교에서 미학과 음악학, 작곡을 공부해 1956년 쇤베르크 연구 논문으로 졸업했어요. 같은 해 독일 뮌헨대학교로 옮겨 음악학과 미술사를 배웁니다.
1957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강좌에서 슈톡하우젠을, 1958년에는 존 케이지를 만났고, 그해부터 쾰른의 WDR 전자음악연구소에서 작업했습니다. 1961년에는 조지 머추너스를 만나 이듬해 비스바덴의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참여해요. 플럭서스는 기존 예술 개념에서 벗어나 음악과 퍼포먼스, 미술을 넘나든 전위 예술 운동이었습니다.
1963년 부퍼탈, 텔레비전이 전시장에 들어오다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이 열렸습니다. 백남준은 텔레비전 열세 대의 내부 회로를 조작해 화면 속 이미지를 바꿔 놓았고,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전시가 텔레비전을 기반으로 한 첫 비디오아트 전시로 기록되고 있다고 설명해요.
전시를 준비하다 나온 〈TV를 위한 선〉은 운송 중 고장 나 화면에 가로줄 하나만 남은 텔레비전을 90도로 돌려, 세로줄 하나만 빛나게 한 작품이에요. 제목의 '선'은 그 세로줄이면서 선불교의 선(禪)을 떠올리게 하죠.
방송을 받아 보던 기계가 손대는 재료가 됐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비디오아트의 출발점으로 불립니다. 수상기도 미술이 될 수 있을까요? 순수미술의 경계가 흐려져 온 과정은 파인 아트, 대체 뭘 말하는 걸까?에 정리해 뒀어요.
뉴욕, 첼로와 텔레비전
1964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만나고, 같은 해 〈로봇 K-456〉과 함께 〈로봇 오페라〉를 초연합니다. 1967년에는 무어먼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공연하다 음란죄로 경찰에 연행됐다가 풀려나기도 했어요.
무어먼과의 작업은 텔레비전을 몸과 악기에 붙이는 데로 나아갑니다. 1969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텔레비전을 몸에 걸치게 했고, 1971년 〈TV 첼로〉는 모니터를 쌓아 만든 첼로로, 현을 켤 때 나는 전자음이 화면 속 영상에 영향을 주도록 설계됐습니다.
1970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보스턴 방송국 WGBH의 지원으로 아베 슈야와 함께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완성했어요. 피아노를 치듯 영상을 자유자재로 편집하는 장치입니다.
TV 부처, 텔레비전이 자기 자신을 보다
1974년 쾰른 쿤스트할레의 《프로젝트 '74》에 〈TV 부처〉가 나왔습니다. 불상 하나가 텔레비전 모니터를 마주하고, 그 화면에는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찍는 불상 자신의 모습이 비쳐요. 카메라와 모니터가 작품 안에서만 맞물리는 폐쇄회로 구조라,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같아집니다.
같은 해 록펠러 재단의 의뢰로 쓴 보고서에서 그는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라는 표현을 처음 썼어요. 인터넷이 일상이 되기 훨씬 전, 세계를 잇는 정보 교환망을 내다본 셈입니다.
위성으로 세계를 잇다, 그리고 과천의 1,003대
1984년 1월 1일, 위성 생방송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뉴욕과 파리를 잇고 미국과 프랑스, 한국, 독일 등지로 방송됐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그린 감시 사회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조지 오웰, 당신은 반만 맞았다"였어요.
한국에서도 KBS가 이 방송을 송출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1984년 한국을 떠난 뒤 처음으로 고국을 찾습니다. 위성 작업은 1986년 〈바이 바이 키플링〉과 1988년 〈세계와 손잡고〉로 이어졌고, 같은 해 서울올림픽을 기념한 〈다다익선〉이 과천관에 불을 밝혔어요. 1,003이라는 숫자에는 10월 3일 개천절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한스 하케와 함께 독일관 작가로 참여해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1995년에는 같은 비엔날레의 한국관 개관을 이끌었습니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작업을 놓지 않았고,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를 거쳐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용인과 과천에서 만나는 백남준
백남준아트센터는 2001년 백남준과 경기도가 건립 논의를 시작해 2008년 10월 경기도 용인에 문을 열었습니다. 생전의 그는 이곳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이름 붙였어요.
20주기인 2026년 이곳에서 해마다 열기로 한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이 시작됐고, 그 전시 《별, 괘卦》가 2026년 7월 16일부터 2027년 2월 14일까지 열립니다.
- 백남준아트센터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로 10.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입장은 오후 5시까지)이고 월요일에 쉬며, 기본 관람은 무료예요. 특별기획전 요금과 휴관일은 백남준아트센터 관람 안내에서 확인하세요.
- 《별, 괘卦》
- 제1회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 전시. 2026년 7월 16일~2027년 2월 14일, 백남준아트센터 제1전시실. 〈비너스〉와 〈시리우스〉(1990), 〈가상의 금성으로 가는 로켓선〉(1991)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 속 별과 위성을 엮은 전시입니다. 자세한 소개는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안내에 있어요.
- 〈다다익선〉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램프코어. 2025년 4월 30일 공지 기준 화요일~일요일 오후 2시~4시, 하루 두 시간 가동해요. 점검이나 행사로 시간이 바뀔 수 있으니 국립현대미술관 상영 시간 공지와 새소식을 확인하세요.
화면 하나보다 화면들이 놓인 방식과 흐르는 시간까지 함께 보는 영상·설치 감상 요령은 조각·설치·미디어아트, 어떻게 볼까요?에 정리해 뒀어요. 과천의 경사로를 오르게 되거든 1,003개의 화면 가운데 하나를 골라 끝까지 지켜보세요. 브라운관을 캔버스로 삼은 사람이 남긴 탑이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백남준은 어떤 작가인가요?
백남준(1932~2006)은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와 독일에서 음악과 미학을 공부한 뒤, 텔레비전을 미술의 재료로 끌어들인 작가예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첫 개인전에서 텔레비전 회로를 조작해 비디오아트의 길을 열었고, 위성 생중계 작업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963년 3월 부퍼탈에서 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텔레비전 열세 대의 내부 회로를 조작해 화면 속 이미지를 바꿔 놓았기 때문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전시가 텔레비전을 기반으로 한 첫 비디오아트 전시로 기록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비디오 신디사이저와 위성 생중계로 영역을 넓혔어요.
〈다다익선〉은 무엇이고 어디서 볼 수 있나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램프코어에 설치한, 모니터 1,003대로 이루어진 높이 18.5m의 탑이에요. 1,003은 10월 3일 개천절의 의미를 담은 숫자입니다. 2018년 2월 가동을 멈췄다가 2022년 9월 15일 다시 켜졌고, 2025년 4월 30일 공지 기준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후 2시~4시에 가동돼요.
〈TV 부처〉는 어떤 작품인가요?
1974년 독일 쾰른 쿤스트할레의 《프로젝트 '74》에 전시된 백남준의 대표작이에요. 불상이 텔레비전 모니터를 마주하고,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찍은 불상 자신의 모습이 그 화면에 비칩니다.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같아지는 폐쇄회로 구조로, 동양의 사유와 서양의 전자 기술이 마주한 장면으로 읽혀요.
2026년에 백남준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2026년 10월 23일 확인 기준으로,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20주기에 시작된 제1회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의 전시 《별, 괘卦》가 2026년 7월 16일부터 2027년 2월 14일까지 열려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다다익선〉을 볼 수 있습니다. 운영 시간은 바뀔 수 있으니 각 기관의 공식 안내를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