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톨레도의 산토 토메 성당에는 엘 그레코의 그림 가운데 가장 이름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걸려 있습니다. 1588년 봄에 완성돼 주문한 성당에 남은 그림이에요.
화면은 두 층입니다. 아래에서는 검은 옷의 톨레도 사람들이 갑옷 입은 죽은 이를 둘러싸고, 위에서는 구름이 소용돌이치는 하늘이 열려요. 땅과 하늘을 한 폭에 담은 이 화가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의 섬 크레타에서 왔어요.
크레타의 이콘 화가, 이탈리아에서 보낸 열 해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1541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땅이던 크레타섬의 칸디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칸디아는 금박 바탕에 성인을 그리는 이콘의 중심지였고, 그는 1563년 기록에 이미 '장인 화가'로 올라 있어요.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별칭입니다.
1567년 초 무렵 그는 베네치아로 건너갑니다. 티치아노의 공방에 몸담았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그와 틴토레토의 그림에서 익힌 색과 붓질이 평생의 바탕이 됐어요. 1570년 로마에 닿자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가 파르네세 추기경에게 그를 "티치아노의 제자"로 소개하는 편지를 썼고, 파르네세 궁에 머물던 그는 1572년 그곳에서 쫓겨나 자기 공방을 차립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허문다면 자신이 더 품위 있게 다시 그리겠다고 했다가 로마 화가들의 반감을 샀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 본명
-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
- 태어난 해와 곳
- 1541년, 크레타섬 칸디아(이라클리온의 옛 이름).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땅이었습니다
- 세상을 떠난 해와 곳
- 1614년 4월 7일, 스페인 톨레도
- 이름
- 스페인에서는 생전에도 '도미니코 그레코', 혹은 그냥 '그리스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 서명
- 톨레도에 자리 잡은 뒤에도 그림에는 그리스 문자로 본명을 적었어요
- 가장 유명한 그림
-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 톨레도 산토 토메 성당
1577년, 톨레도에 닿다
1576년 가을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2세의 주문을 기다리던 그는 이듬해 톨레도로 향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대성당의 〈엘 엑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와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녀원 성당의 제단화를 잇달아 맡았어요. 제단화의 중심이던 높이 4미터 남짓의 〈성모 승천〉(1577~1579)은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곧 두 번의 좌절이 옵니다. 〈엘 엑스폴리오〉 때는 900두카트를 불렀다가 중재 끝에 317두카트로 정해지자 그림을 내주지 않고 버티다 투옥 위협에 넘겼고, 그 뒤 대성당의 주문은 끊겼어요. 펠리페 2세에게 에스코리알 성당 제단용으로 주문받은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도 1582년 완성됐지만, 왕은 끝내 이 그림을 제단에 걸지 않았고 궁정으로 가는 길도 거기서 닫혔습니다.
대신 톨레도가 그의 도시가 됐어요. 1578년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태어났는데, 두 사람의 혼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땅과 하늘을 한 화면에
장례식의 주인공은 1323년에 세상을 떠난 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입니다. 제목은 백작이지만 성당은 그를 '오르가스의 영주'라고 소개해요. 장례 때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구스티노가 하늘에서 내려와 손수 시신을 눕혔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1586년 3월 성당은 이 기적을 그려 달라며 엘 그레코와 계약하면서 아래쪽 장면의 구성까지 꼼꼼히 정해 두었습니다.
아래쪽에는 금빛 제의를 입은 두 성인 뒤로 당대 톨레도 명사들의 얼굴이 초상처럼 늘어섭니다. 왼쪽 아래에서 관객을 보며 기적을 가리키는 소년은 아들 호르헤 마누엘로 알려져 있어요. 주머니 손수건에 그리스 문자 서명과 함께 적힌 1578은 그림이 아니라 아들이 태어난 해입니다. 위쪽에서는 천사가 영혼을 안고 그리스도가 기다리는 하늘로 올라가요.
길게 늘인 몸, 폭풍 치는 하늘
엘 그레코의 그림은 멀리서도 알아봅니다. 인물은 위아래로 길게 늘어나 불꽃처럼 일렁이고, 자연에서 보기 힘든 차가운 색들이 부딪쳐요. 크레타 이콘의 평평한 화면과 베네치아의 색, 로마에서 본 미켈란젤로의 몸이 톨레도에서 한데 섞인 결과이고, 미술사는 이 과장된 형태를 매너리즘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이 길쭉한 몸을 두고 "난시 때문"이라는 설명이 한 세기 넘게 떠돌았지만, 안과학과 지각심리학 연구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추기경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1600년경) 같은 빼어난 초상화를 그린 것도 같은 손입니다. 늘인 몸은 그가 고른 표현이었어요.
풍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해지는 풍경화 두 점 가운데 하나인 〈톨레도 풍경〉에서 그는 대성당의 자리를 옮기고 하늘을 폭풍 직전처럼 끓어오르게 했어요.
긴 망각, 그리고 피카소
1614년 4월 7일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서 세상을 떠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에 묻혔습니다. 유해는 몇 해 뒤 다른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그 성당이 사라지며 행방을 잃었고, 이름도 오래 희미해졌어요. 그를 다시 불러낸 것은 19세기의 수집가와 비평가, 화가들이었습니다.
1908년 스페인의 마누엘 바르톨로메 코시오가 펴낸 연구서는 그를 세계에 다시 알렸어요. 같은 무렵 스페인 화가 이그나시오 술로아가는 1905년에 사들인 〈요한의 환시〉를 파리의 작업실에 두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곳을 드나든 피카소가 이 그림의 인물들에게서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의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합니다. 독일의 청기사파 화가들도 그를 우러렀어요. 큐비즘과 청기사파가 어떤 흐름이었는지는 미술 사조, 5분 만에 따라잡기에서 이어 보세요.
서울에서 만나는 엘 그레코
《스페인 미술 500년: 빛과 어둠의 연대기》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2026년 9월 22일에 개막해 2027년 1월 20일까지 열립니다. 뉴욕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박물관 & 도서관의 소장품 95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로, 엘 그레코의 〈성가족〉(1585년경)이 나왔어요. 관람 정보는 예술의전당 전시 안내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 기간
- 2026년 9월 22일 ~ 2027년 1월 20일, 매주 월요일 휴관
- 장소
-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제1~3전시실
- 관람 시간
- 오전 10시~오후 7시, 입장 마감 오후 6시
- 출품
-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박물관 & 도서관 소장품 95점. 엘 그레코 〈성가족〉(1585년경), 벨라스케스 〈카밀로 아스탈리(팜필리 추기경)의 초상〉(1650~1651), 고야 〈돈 마누엘 라페냐〉(1799), 소로야의 초상화 등
- 관람료
- 성인 23,000원(2026년 10월 19일 확인 기준). 바뀔 수 있으니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
1611년 톨레도로 엘 그레코를 찾아온 화가 파체코의 제자가 벨라스케스, 화가 중의 화가의 주인공이고, 그 벨라스케스를 판화로 옮기며 배운 이가 고야, 궁정의 빛에서 검은 그림까지의 고야입니다. 같은 시기 서울의 다른 전시는 2026 가을 전시, 어디부터 갈까요에 모여 있어요.
톨레도에 간다면 산토 토메 성당의 그림 앞에서 두 번 보세요. 한 번은 아래쪽 얼굴들을, 한 번은 위쪽 하늘을요. 한 화가가 오간 두 세계가 거기 나란히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엘 그레코는 어떤 화가인가요?
1541년 크레타섬 칸디아에서 태어나 이콘 화가로 출발한 화가입니다.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10년 가까이 르네상스 회화를 익힌 뒤 1577년 스페인 톨레도에 자리 잡았고, 161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길게 늘인 인물과 강렬한 색의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렸어요.
엘 그레코 그림 속 인물은 왜 길게 늘어나 있나요?
크레타 이콘의 평평한 화면과 베네치아의 색, 로마에서 본 미켈란젤로의 몸과 매너리즘의 과장된 형태를 톨레도에서 하나로 섞은 의도적인 양식으로 봅니다. 난시 때문이라는 설명이 한 세기 넘게 떠돌았지만 안과학과 지각심리학 연구자들은 이 설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엘 그레코 대표작은 무엇이고 어디서 볼 수 있나요?
가장 유명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은 톨레도 산토 토메 성당에 있습니다. 〈톨레도 풍경〉과 〈요한의 환시〉, 〈추기경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초기 대작 〈성모 승천〉은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하고,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는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가 있어요.
'엘 그레코'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별칭입니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고, 스페인에서는 생전에도 '도미니코 그레코' 혹은 그냥 '그리스 사람'으로 불렸어요. 정작 본인은 톨레도에 자리 잡은 뒤에도 그림에 그리스 문자로 본명을 적어 서명했습니다.
한국에서 엘 그레코 작품을 볼 수 있나요?
2026년 9월 22일부터 2027년 1월 2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의 《스페인 미술 500년: 빛과 어둠의 연대기》에서 엘 그레코의 〈성가족〉(1585년경)을 볼 수 있습니다. 뉴욕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박물관 & 도서관 소장품 95점이 나온 전시예요. 관람 정보는 예술의전당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2026년 10월 19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