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 너머가 비칩니다. 문손잡이와 전등 스위치까지 제자리에 붙어 있는데, 모두 얇은 천으로 되어 있어서 옆방과 그 방에 선 사람이 흐릿하게 보여요. 설치미술가 서도호(Do Ho Suh)가 지은 집 안에 들어서면 대개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2026년 8월 27일부터 2027년 2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 《서도호》는 이 천의 집들을 한국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자리예요. 전시장에 가기 전에, 한 사람이 왜 평생 집을 들고 다녔는지부터 알아 두면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성북동 한옥을 가방에 넣다

서도호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한국화가 서세옥(1929~2020)이고, 자란 곳은 서울 성북동의 한옥이었어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에서 회화를, 예일대에서 조각을 공부했습니다. 그 뒤 뉴욕에서 활동했고, 베를린에 머문 시기를 거쳐 런던에서 살며 작업하고 있어요.

1999년, 그는 성북동의 그 집을 옥색 실크로 실물 크기 그대로 다시 지었습니다. 〈서울 집〉 연작의 출발이에요. 천으로 된 집이라 접으면 가방에 들어갔고, 가방째 다른 도시로 옮겨 가 다시 펼칠 수 있었습니다. 떠나온 사람이 집을 두고 오는 대신 들고 다니게 된 거예요.

집은 한곳에 머무는 것이라는 상식을, 서도호는 접어서 가방에 넣었습니다.

이사의 기록이 된 집들

〈서울 집〉 이후 작업은 그가 살았던 뉴욕과 베를린, 런던의 집으로 넓어집니다. 재료는 반투명한 폴리에스터 천이고, 크기는 실물 그대로예요. 벽이 비치니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고, 관람객은 그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 누군가의 방을 지나가게 됩니다.

〈완벽한 집〉 연작은 그 한가운데 있어요. 《서도호》에 나온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은 제목부터 이사 기록처럼 읽힙니다. 런던 집의 실내를 실물 크기로 떠 낸 윤곽 안에, 그가 살았던 여러 집의 문손잡이와 전등 스위치, 콘센트가 원래 달려 있던 높이 그대로 붙어 있거든요. 문을 열고 불을 켜던 손의 기억이 한 집 안에 모인 셈입니다.

서도호가 거쳐 온 도시 아시아 북아메리카 유럽 서울 프로비던스 뉴욕 베를린 런던 1962 출생 1991 유학 활동 체류 거주·작업 순서만 나타낸 도식입니다. 도시 사이 거리와 머문 기간은 실제 비율이 아니에요
서울에서 태어나 프로비던스와 뉴욕, 베를린을 거쳐 런던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바뀔 때마다 살던 집도 바뀌었습니다. 런던 집을 본뜬 〈완벽한 집〉의 제목에 이 다섯 도시가 모두 들어 있는 것은, 떠나온 집들이 사라지지 않고 한 집 안에 겹쳐 쌓였다는 뜻으로 읽혀요.

집과 집 사이의 공간도 작품이 됩니다. 복도와 통로를 천으로 옮긴 〈Passage/s〉와 〈Hub〉 연작은 머무는 방이 아니라 지나가는 자리를 붙잡아요. 이사를 거듭한 사람에게 집은 머무는 곳이면서 지나가는 곳이기도 했을 테니까요.

〈Fallen Star〉(2012)는 이 이야기를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미국 UC 샌디에이고 캠퍼스 건물의 7층 모서리에, 정원까지 갖춘 작은 집 한 채가 걸쳐 놓여 있어요. 제목처럼 어디선가 떨어져 낯선 건물 귀퉁이에 내려앉은 모습이라, 새 도시에 막 도착한 사람의 처지가 겹쳐 보입니다. 캠퍼스의 공공미술 컬렉션인 스튜어트 컬렉션에 속한 작품이에요.

한 사람과 수많은 사람

집이 '나'의 이야기라면,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묻는 작업도 서도호의 한 축입니다.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될 때 한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에요.

개인과 집단을 묻는 세 작품
〈Some/One〉(2001)
군번줄(도그택)을 수없이 이어 만든 갑옷 형상입니다. 멀리서는 한 벌의 옷인데 가까이서는 낱낱의 인식표가 보여요.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됐습니다.
〈Floor〉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인물상이 두 팔을 들어 유리 바닥판을 떠받칩니다. 관람객은 그 유리 위를 걸어요.
〈Who Am We?〉
졸업앨범 증명사진을 아주 작게 줄여 빼곡히 채운 벽지입니다. 멀리서는 점무늬로 보이다가, 다가가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요.

세 작품 모두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다릅니다. 물러서면 덩어리가, 다가서면 그 덩어리를 이룬 한 사람이 보이죠. 발밑의 인물상을 내려다보는 순간에는 내가 딛고 선 자리를 누가 받치고 있는지도 묻게 됩니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어떤 무대인지는 비엔날레가 대체 뭔가요?에 정리해 뒀어요.

표면을 문질러 뜨다

천의 집이 공간의 부피를 옮긴다면, 〈러빙/러빙(Rubbing/Loving)〉 연작은 표면을 옮깁니다. 방과 집의 모든 표면에 종이를 붙이고 연필과 색연필로 문질러, 공간 전체를 탁본처럼 떠 내는 작업이에요. 문지르다(rubbing)와 사랑하다(loving)의 발음이 겹치는 제목처럼, 손으로 오래 쓰다듬는 일 자체가 작업의 방식입니다.

대상은 그가 떠나왔거나 사라질 장소들이었습니다. 뉴욕 웨스트 22번가의 아파트, 성북동의 서울 집, 광주극장 사택이 그렇게 종이 위로 옮겨졌어요. 그중 〈러빙/러빙: 서울 집〉은 2013년에 시작해 2022년까지 이어진 작업입니다.

〈러빙/러빙〉이 옮기는 것은 공간의 모양이 아니라, 그 공간을 오래 만지던 손길입니다.

집 속의 집, 서울박스에서 다시

한국에서 그의 집을 크게 만날 수 있었던 자리도 '집'을 제목에 달고 있었습니다. 2012년 리움미술관 개인전 《집 속의 집》이 그랬고, 이듬해인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개관할 때 서울박스에 설치된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도 그랬어요.

이 작품은 그가 1991년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처음 살았던 3층 집을 실물 크기의 천으로 짓고, 그 안에 성북동 한옥을 매단 것입니다. 제목에 집이 다섯 번 들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한옥은 미국 집 안에, 미국 집은 서울박스 안에, 서울박스는 미술관 안에, 미술관은 다시 서울 안에 있으니까요. 두 나라의 두 집을 미술관과 도시가 겹겹이 감싸는 구조입니다.

2026년 8월 27일, 같은 미술관에서 그의 개인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전시가 막을 올렸습니다. 2025년 5월부터 10월까지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서도호: Walk the House》를 연 이듬해예요. 2013년에 천의 집이 걸렸던 서울박스에는 2026년 12월 18일부터 2027년 3월 28일까지 뉴욕 아파트의 복도와 계단을 옮긴 대형 설치작이 다시 들어섭니다.

《서도호》, 이렇게 보면 좋아요

전시는 유년기 드로잉과 조각, 대학 시절 작업을 모은 〈시드 뱅크〉에서 시작합니다. 그다음부터는 연대순으로 칸을 나누지 않았어요. 시기가 다른 작업, 드로잉과 설치가 서로를 비추도록 한 흐름으로 엮여 있어서, 연표를 따라가기보다 집이라는 주제가 모양을 바꿔 가며 되돌아오는 것을 알아차리는 편이 잘 맞습니다.

《서도호》 한눈에 보기
기간
2026년 8월 27일 ~ 2027년 2월 9일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 1층 3·4·5전시실, 2층 MMCA 스튜디오
서울박스 설치
2026년 12월 18일 ~ 2027년 3월 28일, 〈아파트 A, 복도와 계단, 미국 뉴욕 웨스트 22번가 348번지, NY 10011〉
규모
유년기 드로잉부터 대표작까지 500여 점
관람료
8,000원. 관람 시간과 휴관일, 예매 방식은 공식 안내에서 확인하세요.

앞에서 이야기한 〈완벽한 집〉과 〈러빙/러빙〉 연작(서울 집, 광주극장 사택, 미국 뉴욕 웨스트 22번가)을 비롯해, 서울 집과 뉴욕 집 사이 어딘가에 '완벽한 집'을 놓는다면 어디여야 할지 계산하고 상상하는 〈다리 프로젝트〉, 개인과 집단을 다룬 〈Who am we/바닥〉이 나와 있습니다. 〈로빈 후드 가든〉(2018)은 철거를 앞둔 런던의 공공주택 단지를 기록한 영상으로, 2018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에 출품된 작업이에요.

500여 점이 나온 전시라 하루에 다 훑으려 하면 금세 지칩니다. 천의 집 앞에서는 밖에서 한 번 둘러보고,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라면 안에서 다시 한 번 보세요. 벽 너머로 다른 관람객이 비치는 순간까지가 작품의 일부예요. 설치 작품을 몸으로 보는 법은 조각·설치·미디어아트, 어떻게 볼까요?에, 큰 전시를 지치지 않고 도는 요령은 대형 거장전, 어떻게 봐야 할까요?에 정리해 뒀습니다.

관람 안내는 국립현대미술관 공식 사이트에 있어요. 2026년 가을에 함께 둘러볼 다른 전시는 2026 가을 전시, 어디부터 갈까요에 끝나는 날짜순으로 묶어 뒀습니다.

집은 어디에 있을까

서도호의 집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접히고, 가방에 들어가고, 바다를 건너 다른 도시의 전시장에서 다시 펼쳐지죠. 그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묻게 돼요. 집은 벽과 지붕일까, 아니면 문을 열고 불을 켜던 손의 기억일까.

관람객이 들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설치가 더 궁금하다면 쿠사마 야요이, 점으로 우주를 덮은 사람의 무한 거울방으로 이어 가 보세요. 그리고 전시장에서 그의 천의 집을 지나게 되거든, 잠깐 멈춰 벽 너머를 건너다보세요. 거기 비치는 것이 누구의 집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거예요.

자주 묻는 질문

서도호는 어떤 작가인가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설치미술가입니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회화, 예일대에서 조각을 공부했어요. 뉴욕과 베를린을 거쳐 런던에서 살며 작업하고, 살았던 집을 반투명한 천으로 실물 크기 그대로 다시 짓는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도호전은 언제까지 하나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서도호》는 2026년 8월 27일부터 2027년 2월 9일까지예요. 지하 1층 3·4·5전시실과 2층 MMCA 스튜디오에서 유년기 드로잉부터 대표작까지 500여 점을 보여 주고, 서울박스에는 2026년 12월 18일부터 2027년 3월 28일까지 대형 설치작이 따로 공개됩니다. 관람 안내는 국립현대미술관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

서도호의 천으로 만든 집은 무엇인가요?

작가가 살았던 집을 천으로 실물 크기 그대로 다시 지은 설치 작품입니다. 1999년 성북동 한옥을 옥색 실크로 지은 〈서울 집〉 연작이 대표적이고, 이후 뉴욕과 베를린, 런던의 집으로 이어졌어요. 접어서 옮길 수 있고 반투명해서, 안에 들어서면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은 어떤 작품인가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개관할 때 서울박스에 설치된 작품입니다. 작가가 1991년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처음 살았던 3층 집을 실물 크기의 천으로 짓고, 그 안에 성북동 한옥을 매달았어요. 한옥이 미국 집 안에, 미국 집이 서울박스와 미술관, 서울 안에 겹겹이 놓인다는 뜻이 제목에 담겨 있습니다.

서도호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2026년 8월 27일부터 2027년 2월 9일까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서도호》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요.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작품으로는 미국 UC 샌디에이고 캠퍼스 건물 7층 모서리에 걸린 〈Fallen Star〉(2012)가 있습니다. 미술관 소장품은 전시 일정에 따라 걸리고 내려가니 방문 전에 공식 안내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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