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궁의 한 방에 들어서면 벽 위쪽의 커다란 반원 안에 사람이 빼곡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산 고대의 철학자들이 한 건물에 모여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계단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붐비는 화면 앞에서 이상하게도 눈이 길을 잃지 않습니다. 시선이 저절로 한가운데의 두 사람에게 모이거든요. 〈아테네 학당〉, 이십 대의 라파엘로가 그린 벽입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의 막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는 1483년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1520년 4월 6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른일곱 해의 생애였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생), 미켈란젤로(1475년생)와 함께 흔히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묶이는데, 셋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어났고 가장 짧게 살았습니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우르비노 궁정에서 일하던 화가였습니다. 화가의 집에서 태어난 셈이지만, 아버지는 라파엘로가 열한 살 무렵 세상을 떠나요. 그 뒤 그는 움브리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스물한 살 무렵인 1504년에 그린 〈성모의 결혼〉(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이 이 시기의 대표작입니다. 앞쪽에서 혼례가 치러지고, 광장 바닥의 줄눈은 화면 뒤 한가운데의 둥근 지붕 신전을 향해 모여들어요. 사람과 건물을 한 점 둘레에 가지런히 세우는 감각이 이때 이미 보입니다.

라파엘로 한눈에
태어난 해와 곳
1483년, 이탈리아 우르비노
세상을 떠난 날
1520년 4월 6일, 로마. 서른일곱이었습니다
대표작
〈아테네 학당〉(1509~1511년경), 〈시스티나의 성모〉(1512~1513년경)
로마에서 맡은 일
바티칸 궁의 방 벽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1514년부터), 고대 유적 관리(1515년부터)
묻힌 곳
로마 판테온

피렌체에서 배운 두 선배의 화면

1504년 무렵부터 1508년까지,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머뭅니다. 이 도시에서 그가 붙든 것은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두 선배의 작업이었어요.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성모자 그림들입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의 〈초원의 성모〉(1505~1506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아름다운 정원사〉가 모두 이때 나왔어요. 세 그림 모두 풍경을 등지고 앉은 성모 곁에 아기 예수와 어린 세례 요한이 모여, 세 인물이 하나의 삼각형 안에 들어앉습니다.

삼각형 안에 인물을 쌓는 구도와 윤곽을 안개처럼 풀어 주는 스푸마토, 둘 다 다 빈치에게서 온 것이에요. 스푸마토가 어떤 기법인지는 다빈치의 스무 점, 그리고 수천 장의 노트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다 빈치의 얼굴들이 보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남긴다면, 라파엘로의 성모자는 같은 기법으로 한결 온화하고 안정된 화면을 만들어 냅니다.

1508년, 바티칸의 두 작업장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갑니다. 맡은 일은 바티칸 궁에서 교황이 쓰던 방들의 벽을 프레스코로 채우는 것이었어요. 이 방들을 이탈리아어로 '스탄차(stanza)'라고 부릅니다. 스물다섯 살이 받기에는 무척 큰 일이었습니다.

같은 해, 같은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을 맡겼습니다.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두 사람은 같은 바티칸 궁 안에서 나란히 붓을 든 셈이에요. 한쪽은 스스로를 조각가로 여기면서도 고개를 젖힌 채 천장과 씨름했고, 다른 한쪽은 여덟 살 아래의 젊은 화가로서 방의 벽을 하나씩 채워 나갔습니다. 천장 쪽 사정은 미켈란젤로, 돌 안에 이미 있던 형상에 자세히 있어요.

〈아테네 학당〉이 그려진 '서명의 방'은 원래 율리우스 2세가 서재 겸 집무실로 쓰던 곳입니다. 라파엘로가 바티칸에서 가장 먼저 그림을 그린 방이기도 해요.

〈아테네 학당〉, 누가 누구인지보다 어디에 섰는지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 1509~1511, 프레스코, 바티칸 궁 서명의 방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09~1511년경. 바티칸 궁 '서명의 방'. 겹겹이 물러나는 아치 끝의 하늘을 등지고, 위를 가리키는 플라톤과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걸어 나옵니다.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아테네 학당〉(1509~1511년경) 앞에 선 사람들은 대개 누가 누구인지부터 찾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 그림을 붙드는 힘은 인물의 이름보다 자리에서 나옵니다.

먼저 건물을 보세요. 아치가 겹겹이 물러나며 화면 안쪽으로 깊어지고, 바닥과 둥근 천장의 선들은 모두 한 점으로 모입니다. 원근법에서 소실점이라 부르는 그 점이 놓인 자리가 한가운데를 걸어 나오는 두 사람 사이예요. 왼쪽의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쪽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땅 쪽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을 향한 생각과 발 딛은 현실에서 출발하는 생각이 몸짓 하나로 위아래로 갈라지는 셈이죠.

나머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무리를 이룹니다. 왼쪽 앞에는 책에 무언가를 적는 인물이, 오른쪽 앞에는 몸을 숙여 컴퍼스로 무언가를 재는 인물이 양쪽에서 짝을 이루듯 놓였어요. 흔히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로 읽히는 두 사람입니다. 계단 한복판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인물은 디오게네스로 알려져 있고요.

〈아테네 학당〉: 선은 한 점으로, 사람은 양쪽으로 소실점 플라톤 하늘을 가리킴 아리스토텔레스 손바닥을 땅 쪽으로 왼쪽 무리 오른쪽 무리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아테네 학당〉의 위치 관계만 옮긴 도식으로, 실제 작품이 아닙니다. 건물의 선은 모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한 점으로 모이고, 사람들은 그 점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섭니다. 앞쪽 계단 한가운데가 비교적 트여 있어서, 눈이 사람들 사이를 헤매지 않고 곧장 두 사람에게 닿아요.

깊이는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고, 사람들은 그 양옆에서 무게를 나눠 균형을 맞춥니다. 라파엘로라는 이름에 '조화'라는 말이 먼저 따라붙는 이유가 이 벽 한 면에 들어 있어요.

붐비는 화면을 정돈한 것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자리였습니다. 누가 어디에 서느냐를 정하는 일, 라파엘로의 조화는 그 배치의 기술이었어요.

그림에는 이야기도 여럿 따라붙습니다. 플라톤의 얼굴이 다 빈치를 닮게 그려졌다는 이야기, 앞쪽 계단에서 턱을 괸 채 무언가를 적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며 나중에 덧그려졌다는 이야기, 오른쪽 끝에서 검은 모자를 쓰고 이쪽을 바라보는 젊은이가 라파엘로 자신이라는 이야기예요. 모두 확인된 기록이라기보다 오래 전해 온 해석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래도 두 선배가 한 벽에 나란히 불려 나왔다고 상상해 보면, 그림이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하죠.

눈에 보이는 세상을 충실하게 옮긴 이런 그림이 왜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지는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에서 〈아테네 학당〉을 예로 들어 설명했어요.

서른 살 무렵의 로마

로마에서 라파엘로의 일은 방 벽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512년에서 이듬해 무렵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는 양쪽으로 걷힌 커튼 사이로 성모가 아기를 안고 구름을 딛고 선 그림이에요. 이름이 닮았을 뿐,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과는 다른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화면 맨 아래에서 턱을 괸 두 아기 천사예요.

라파엘로 산치오, 시스티나의 성모(Madonna Sistina), 1512~1513, 캔버스에 유채,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 소장
라파엘로 산치오, 〈시스티나의 성모〉, 1512~1513년경.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 소장. 성모와 아기가 구름을 딛고 서 있고, 맨 아래 난간에는 두 아기 천사가 턱을 괸 채 위를 올려다봅니다.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초상화에서도 이름을 얻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초상〉(1514~1515년경)과 우피치 미술관의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1518년경)이 대표적이에요.

일은 그림 밖으로도 넓어졌습니다. 1514년 건축가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나자, 라파엘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이듬해인 1515년에는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고대 유적을 관리하는 일까지 맡겼어요. 서른을 갓 넘긴 화가가 그림과 건축과 유적을 한꺼번에 떠안은 셈입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죠. 라파엘로는 큰 공방을 꾸려 줄리오 로마노 같은 제자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와 손잡고 자기 구도를 판화로 퍼뜨리기도 했어요. 벽화는 한자리에 머물지만, 종이에 찍힌 판화는 여러 도시로 건너갈 수 있으니까요. 찍어낸 그림을 복제로 봐야 할지 창작으로 봐야 할지는 판화, 복제품 아닌가요?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그렇게 퍼진 판화 가운데 라이몬디가 라파엘로의 구도를 새긴 〈파리스의 심판〉이 있습니다. 세 세기가 훌쩍 지난 1863년, 파리의 마네가 이 판화의 한 부분을 가져와 〈풀밭 위의 점심〉의 구도로 삼았어요. 옛 거장의 구도에 당대의 인물을 앉힌 그 그림이 불러온 소동은 마네, 살롱을 떠나지 않은 혁명가에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

서른일곱, 그리고 라파엘로 이후

마지막 그림은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그리스도의 변용〉(1516~1520)입니다. 라파엘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이 그림을 붙들고 있었고, 화면 아래쪽 일부 인물은 그가 떠난 뒤 제자들이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1520년 4월 6일,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 때 이 그림이 그의 머리맡에 놓였다고 전해져요. 그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습니다.

그 뒤 라파엘로의 이름은 19세기까지 '이상적인 그림'의 기준으로 통했습니다. 그 위상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 1848년 영국에서 일어납니다. 젊은 화가들이 라파엘로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며 모임을 만들고, 이름을 아예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고 붙였거든요. 넘어서야 할 기준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내걸었다는 것 자체가, 그 이름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말해 줍니다.

19세기 이후의 미술이 어떤 사조를 거쳐 흘러갔는지는 미술 사조, 5분 만에 따라잡기에서 한눈에 볼 수 있어요.

언젠가 서명의 방에 서게 되거든, 이름표를 찾기 전에 두 사람 사이의 한 점부터 찾아보세요. 그 점을 찾고 나면 양옆에 선 수많은 사람이 저절로 제자리를 잡아 보일 거예요. 서른일곱 해를 산 화가가 왜 수백 년 동안 조화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지, 그 앞에서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테네 학당〉은 어디에 있나요?

바티칸 궁의 '서명의 방'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예요. 라파엘로가 1509년부터 1511년 무렵까지 그렸고, 원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재 겸 집무실로 쓰던 방입니다. 벽에 직접 그린 그림이라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고, 바티칸 미술관 관람 동선 안에서 만나게 돼요.

〈아테네 학당〉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을 가리키나요?

화면 한가운데를 걸어 나오는 두 사람 가운데 왼쪽의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쪽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땅 쪽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을 향한 생각과 발 딛은 현실에서 출발하는 생각이 몸짓 하나로 갈라지는 장면으로 흔히 읽혀요. 건물의 선이 모이는 소실점도 바로 이 두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누구인가요?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생), 미켈란젤로(1475년생), 라파엘로(1483년생)를 함께 묶어 부릅니다. 라파엘로는 셋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어났고, 서른일곱에 세상을 떠나 가장 짧게 살았어요. 피렌체에서 두 선배의 작업을 흡수한 뒤 로마에서 자기만의 조화로운 화면을 완성했습니다.

라파엘로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아테네 학당〉은 바티칸 궁의 '서명의 방'에, 마지막 그림 〈그리스도의 변용〉은 바티칸 미술관에 있어요. 〈시스티나의 성모〉는 독일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 〈초원의 성모〉는 빈 미술사박물관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사〉와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초상〉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어요.

라파엘로는 왜 일찍 세상을 떠났나요?

1520년 4월 6일, 서른일곱의 나이로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짧은 병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병의 정체를 비롯한 세부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아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과 고대 유적 관리, 큰 공방 운영까지 맡고 있던 한창때였고, 마지막 그림 〈그리스도의 변용〉은 아래쪽 일부 인물을 제자들이 마무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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