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마주치면 걸음이 한 번 멈칫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앙상하게 뒤틀린 몸, 날카롭게 꺾이는 윤곽선, 화면 밖을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 예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데 자꾸 눈길이 되돌아가는 그림이에요. 에곤 실레의 작품입니다. 이 선을 그은 사람은 스물여덟 해를 살았어요.
클림트의 작업실을 찾아간 소년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1890년 빈 근교의 툴른에서 태어났습니다. 철도역장의 아들이었어요. 소년 시절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고, 이 상실은 오래도록 그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열여섯에 그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갑니다. 어린 나이에 명문에 붙었으니 순탄한 출발처럼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답답해했어요. 석고상을 그대로 옮겨 그리는 훈련과 옛 거장을 본받으라는 주문이 되풀이되는 보수적인 수업이, 자기가 하려는 그림과 너무 멀었거든요.
그래서 1907년, 열일곱의 실레는 한 사람을 직접 찾아갑니다. 당시 빈 미술계에서 가장 화제였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였어요. 무명의 학생이 대가의 작업실 문을 두드린 셈인데, 클림트는 이 소년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봅니다. 이후 클림트는 자기 모델을 소개해 주고 전시에 나설 자리를 만들어 주며, 어린 화가의 후원자이자 스승이 됐어요. 클림트가 세기말 빈에 남긴 것 가운데 가장 값진 하나로 이 만남을 꼽는 사람도 많습니다.
1909년 실레는 아카데미를 떠납니다. 뜻이 맞는 또래들과 신예술가그룹(Neukunstgruppe)을 만들었어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자기 이름을 걸고 판을 벌인 셈이죠.
장식을 걷어낸 자리
스승과 제자의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대번에 보입니다. 클림트의 화면은 금빛 문양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요. 실레는 그 장식을 거의 다 걷어냅니다. 남은 것은 꺾이고 부러질 듯한 윤곽선, 비틀린 몸, 그리고 인물 둘레를 그대로 비워 둔 여백이었죠.
실레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그는 밑그림을 여러 번 고쳐 그리지 않았어요. 종이 위에 단번에 그어 내려간 선 하나로 형태와 긴장을 함께 잡아냅니다. 지우고 다듬은 자국이 거의 없는데도 형태가 정확해서, 드로잉만으로 미술사의 정상급에 놓이는 몇 안 되는 화가로 꼽혀요. 종이 작업이 습작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이 되는 자리에 대해서는 드로잉, 스케치, 데셍의 차이에서 정리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자화상이에요. 실레는 자기 얼굴과 몸을 100점이 넘게 그렸습니다. 그것도 근사하게 꾸민 모습이 아니라 손가락을 기이하게 벌리고 어깨를 뒤틀고 갈비뼈를 드러낸 모습으로요. 자기 자신을 이토록 집요하게 들여다본 화가는 미술사에 흔치 않습니다. 그의 자화상 앞에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 꺾이는 윤곽선
- 둥글게 흐르지 않고 각을 만들며 방향을 바꿉니다. 선 자체가 긴장하고 있어요.
- 비틀린 몸
- 이상적인 비례 대신 마르고 각진 몸을 그대로 둡니다. 자세도 편안한 법이 없죠.
- 비워 둔 배경
- 인물 둘레를 장식으로 채우지 않습니다. 남은 여백이 인물을 더 고립돼 보이게 만들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겪는 것을 그린다는 점에서 실레는 뭉크와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뭉크가 불안을 물결치는 곡선으로 옮겼다면, 실레는 그것을 꺾이는 직선과 뒤틀린 몸으로 옮겼어요. 두 사람이 각자 낸 길이 20세기 초 표현주의로 모입니다. 이 흐름이 미술사 전체에서 어디쯤 놓이는지는 미술 사조, 5분 만에 따라잡기에서 지도처럼 볼 수 있어요.
시대와 불화한 화가
실레의 그림은 당대에 큰 논란을 불렀습니다. 특히 누드가 그랬어요. 그는 몸을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손질하지 않고 마르고 각지고 불안한 상태 그대로 화면에 올렸습니다. 관능을 우아한 장식으로 감싼 스승과 달리, 실레의 몸은 감싸는 것 없이 날것으로 드러났죠.
1912년에는 법적인 문제까지 겪습니다. 빈을 떠나 노이렝바흐라는 소도시에 머물던 그는 어린 모델과 관련한 고발로 체포돼 24일간 구금됐어요. 재판에서 무거운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미성년자가 볼 수 있는 곳에 노골적인 드로잉을 둔 혐의 하나였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볼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립니다. 다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어요. 실레가 살던 빈은 겉으로 점잖고 화려했지만 그 아래에서는 억눌린 것들이 부글거리던 도시였고, 그는 그것을 굳이 화면 위로 끌어올린 화가였다는 점입니다. 그림이 꼭 편안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는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에서 조금 다른 각도로 다뤘어요.
1915년, 실레는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합니다. 같은 해에 그린 〈죽음과 소녀〉는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을 그린 작품인데, 제목이 일러 주듯 그 포옹의 한쪽에는 죽음이 서 있어요.
1918년, 가장 높은 곳에서
1918년은 실레에게 모든 일이 한꺼번에 몰려온 해였습니다.
2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납니다. 열일곱의 자신을 알아봐 준 스승이자 빈 미술계의 중심이 사라진 거예요.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빈 분리파 제49회 전시가 열립니다. 실레는 이 전시의 중심 자리를 맡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작품은 팔려 나갔고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스승이 비운 자리에 그가 곧바로 올라선 셈이었죠.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빈 화단의 새 주역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스페인 독감이 유럽을 덮칩니다. 10월 28일, 임신 6개월이던 아내 에디트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사흘 뒤인 10월 31일, 실레도 같은 병으로 뒤를 따랐습니다. 스물여덟이었어요.
스물여덟 해가 남긴 것
아카데미를 떠난 1909년부터 헤아리면 그가 자기 이름을 걸고 작업한 기간은 채 열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는 유화와 드로잉을 놀라울 만큼 많이 남겼고, 자기 얼굴만 100점 넘게 그렸어요. 짧았던 만큼 촘촘했던 셈이죠.
오늘날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은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입니다. 한 개인 수집가가 평생에 걸쳐 모은 컬렉션이 그 바탕이 됐고, 미술관 이름도 그 수집가에게서 왔어요. 빈에서 클림트의 금빛을 본 뒤 실레의 방으로 건너가 보면, 한 세대 사이에 그림이 얼마나 멀리 갔는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실레의 그림 앞에서 편안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애초에 편안한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대신 그의 선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얼마나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스물여덟 해가 짧았다는 사실은, 그 선 앞에 서 보면 조금 다르게 다가와요.
자주 묻는 질문
에곤 실레는 왜 유명한가요?
꺾이는 윤곽선과 뒤틀린 몸으로 인간의 불안을 그린 오스트리아 화가예요. 스승 클림트의 화려한 장식을 걷어낸 자리에 날것의 감정을 채워 넣었고, 지운 자국 없이 단번에 긋는 선의 힘 덕분에 드로잉만으로도 미술사의 정상급으로 꼽힙니다.
실레와 클림트는 어떤 사이였나요?
1907년, 열일곱이던 실레가 존경하던 클림트를 직접 찾아가면서 인연이 시작됐어요. 클림트는 어린 학생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자기 모델을 소개해 주고 전시에 나설 자리를 만들어 주는 후원자이자 스승이 됐습니다. 두 사람은 1918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어요.
실레 그림은 왜 불편하게 느껴지나요?
몸을 아름답게 손질하지 않고 마르고 각진 상태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에요. 배경도 장식으로 채우지 않고 비워 두어서 인물이 한층 고립돼 보입니다. 여기에 화면 밖을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이 더해지면, 보는 사람이 구경꾼이 아니라 마주 선 사람이 되죠.
에곤 실레는 왜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나요?
1918년 가을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 때문이었습니다. 10월 28일 임신 6개월이던 아내 에디트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사흘 뒤인 10월 31일 실레도 같은 병으로 숨을 거뒀어요. 그해 3월 빈 분리파 전시에서 큰 성공을 거둔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실레 작품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한 곳은 오스트리아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이에요. 한 개인 수집가가 평생 모은 컬렉션이 바탕이 됐고, 미술관 이름도 그 수집가에게서 왔습니다. 빈의 다른 미술관들과 유럽 각지의 주요 미술관에서도 그의 유화와 드로잉을 만날 수 있어요.